오랜만에 바깥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서 외출했다.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서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었다.
책은 당연히 요 근래에 대체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많이 읽은; 상실의 시대.
집에 쳐박혀 읽는 것과, 햇살 아래 잔디밭에서 읽는 책은 감상이 달랐다.
아니,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이랄까.
덕분에 글이 막혀버렸다. 막다른 벽이다.
하루키 탓이야아아! ;ㅁ; 라고 울부짖다가,
……예전에 썼던 하루키 관련 글이 생각나 가져와 포스팅해본다.
(우울한 느낌이 싫으신 분은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한창 심각할 때(?)라서 그런지 글이 무겁네요. 덤으로 헛소리도 상당히 많이 적혀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고, 나는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글의 말미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굉장히 각 사건의 의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지만, 이를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내가 얻은 답답함이 너무도 크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고―비록 정리된 글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 중에 있는 ‘표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있었던 마음의 혼란을 내 스스로 나에게 주어진 ‘표지’라고 해당하는 사건으로 잠재웠다. 내가 ‘표지’라는 것에 대해, 조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그러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코엘료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고, 내 마음 속의 혼란을 글로 옮기고, 결국 아무 것도 결론짓지 못하고 부질없는 외침으로 그 글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 외침은―그 방향과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내가 그 직후에 ‘우연하게도’, ‘왠지 마음이 끌려서’, 다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 원제-노르웨이의 숲>의 말미, 주인공 ‘나’의 외침과 상당 부분 닮아 있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할 뿐, 근거는 없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얼굴을 들고 공중 전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딘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미도리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완벽하게 일치하지도, 그렇다고 굉장히 유사한 것도 아니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든―나오코의 ‘말 찾기 병’이 옮았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마치 그러한 느낌이다― 기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그 순간 나의 관점에서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원인이야 어쨌든, 내가 굉장히 이 소설에 동감하고, 그만큼 이 소설에 감정 이입 했다는 것만큼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앞으로도 내 안에서 부동의 베스트 원을 차지하게 된 것도, 어찌보면 굉장한 우연의 일치인 셈이다. 하지만 나를 이것을 ‘표지’에서 비롯된 일종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상실의 시대>에 대한 감상은 아마도 다시 적겠지만, 이 소설에서 하루키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라고 작가 스스로가 이미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하루키 자신이 원한만큼―혹은 그 이상으로― 공감하고 반응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하루키를 존경하지만―이 소설 하나만으로 하루키는 앞으로 내게 있어 최고의 작가일 것이다―, 내게 족쇄가 되었다는 것의 이유이다.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반응해버렸기 때문에, 이 소설은 내 안에서 너무도 깊숙하게―이미 나 자신과 하나가 되어버려 도저히 떼어낼 수 없게―자리를 잡아버려서, 나로서는 이를 외면할 수가 없다.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것이 아닌 추상적인 소재지만― 글을 쓰고 싶었다. 상당히 진지하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나로는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소재에서 좀더 구체적인 것으로 범위를 좁히려고 하면, <상실의 시대>가 얘기하고자 하는―순전히 내 맘대로 해석한 주제이지만― 바가 떠올라 버리고, 스스로 채찍질하여 ‘같은 주제라 해도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면 되지 않겠어?’라고 생각해도, 글의 전개,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생각해내려고 하면, 내 안에서 ‘나’와 ‘나오코’, ‘미도리’ 등등이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족쇄’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너무도 내 안에 깊이 박혀버려서,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다.
상상력과 창조력의 한계라고 할까, 아니면 원래 모든 것들을 내 안에 잘 살아 숨쉬게 한다고 할까. 항상 그래왔었다. 한동안 장르 소설(특히 판타지)을 쓰려고 했을 때는―물론 지금도 쓰려고 하고 있기는 하다―, 심도 있는 주제를 써보고자 할 때는 이영도의 소설들이, 감동적인 것을 써보고자 할 때는 <하얀 로냐프 강>이, 내 상상의 한계로 존재했었다. 무엇인가를 써보려고만 하면, 내가 읽고 감동했던, 혹은 깊이 감탄했던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그 외에 다른 것은 잘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그 병세(?)가 깊다. 아니, 깊은 정도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두려움마저 존재한다. <하얀 로냐프 강>이나 <드래곤 라자>와 같은 판타지는, 아무리 멋진 주제와 감탄할만한 문체 등으로 이루어져도 현실적인 면이 상당 부분 결여되어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작가가 글을 적을 때, 환상 소설이라는 방식이 그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개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계산(?)으로 고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이 그 배경이 비현실적이라는 의미다. 배경이 환상이기에, 극복하려고하면 어느 정도는 극복해낼 수 있다. (아마도)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상실의 시대>외에도 대부분―은, 판타지와는 달리 직접 온 몸으로 느껴지는 현실적인 면들이, 나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다.
내가 ‘족쇄’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다. 완벽하게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의미다.
이 ‘족쇄’라는 것은, 하나의 벽과 같아서 내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나는 아마도 글을 쓰기 힘들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글을 전혀 쓰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만족할만하게 표현해내지 못할 것이다―는 의미다. 이 벽을 넘는 것은―즉 족쇄에서 벗어나는 것은―, 엉망일지라도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적거나, 아니면 나 자신의 내면적 깊이를 더욱 깊게 하다보면, 아니면 어떤 특정한 계기를 통해 한 순간에, 넘어지지 않을까……하고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내게 일종의 족쇄다. 하지만, 나를 방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저히 그를 싫어할 수가 없다. 이는 결코 내가 그를 존경하는 것과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zero-sum을 이루기 때문은 아니다. 그를 원망(?)하는 것도 분명히 나 자신이고, 그를 존경하는 것도 나 자신이지만, 내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단지 그러한 소설을 써낸, 그라는 한 인간 자체를 존중하기 때문―뭔가 굉장히 잘 맞지 않는 단어 선정이지만,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이다(이것이 곧 존경일 수도 있지만, 뭔가 조금 느낌이 다르다).
내가 평생 지금의 이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계속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졌다고 생각하련다.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서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었다.
책은 당연히 요 근래에 대체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많이 읽은; 상실의 시대.
집에 쳐박혀 읽는 것과, 햇살 아래 잔디밭에서 읽는 책은 감상이 달랐다.
아니,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이랄까.
덕분에 글이 막혀버렸다. 막다른 벽이다.
하루키 탓이야아아! ;ㅁ; 라고 울부짖다가,
……예전에 썼던 하루키 관련 글이 생각나 가져와 포스팅해본다.
(우울한 느낌이 싫으신 분은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한창 심각할 때(?)라서 그런지 글이 무겁네요. 덤으로 헛소리도 상당히 많이 적혀있습니다;;)
본문
파울로 코엘료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고, 나는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글의 말미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굉장히 각 사건의 의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지만, 이를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내가 얻은 답답함이 너무도 크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고―비록 정리된 글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 중에 있는 ‘표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있었던 마음의 혼란을 내 스스로 나에게 주어진 ‘표지’라고 해당하는 사건으로 잠재웠다. 내가 ‘표지’라는 것에 대해, 조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그러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코엘료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고, 내 마음 속의 혼란을 글로 옮기고, 결국 아무 것도 결론짓지 못하고 부질없는 외침으로 그 글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 외침은―그 방향과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내가 그 직후에 ‘우연하게도’, ‘왠지 마음이 끌려서’, 다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 원제-노르웨이의 숲>의 말미, 주인공 ‘나’의 외침과 상당 부분 닮아 있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할 뿐, 근거는 없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얼굴을 들고 공중 전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딘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미도리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완벽하게 일치하지도, 그렇다고 굉장히 유사한 것도 아니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든―나오코의 ‘말 찾기 병’이 옮았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마치 그러한 느낌이다― 기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그 순간 나의 관점에서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원인이야 어쨌든, 내가 굉장히 이 소설에 동감하고, 그만큼 이 소설에 감정 이입 했다는 것만큼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앞으로도 내 안에서 부동의 베스트 원을 차지하게 된 것도, 어찌보면 굉장한 우연의 일치인 셈이다. 하지만 나를 이것을 ‘표지’에서 비롯된 일종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상실의 시대>에 대한 감상은 아마도 다시 적겠지만, 이 소설에서 하루키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라고 작가 스스로가 이미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하루키 자신이 원한만큼―혹은 그 이상으로― 공감하고 반응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하루키를 존경하지만―이 소설 하나만으로 하루키는 앞으로 내게 있어 최고의 작가일 것이다―, 내게 족쇄가 되었다는 것의 이유이다.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반응해버렸기 때문에, 이 소설은 내 안에서 너무도 깊숙하게―이미 나 자신과 하나가 되어버려 도저히 떼어낼 수 없게―자리를 잡아버려서, 나로서는 이를 외면할 수가 없다.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것이 아닌 추상적인 소재지만― 글을 쓰고 싶었다. 상당히 진지하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나로는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소재에서 좀더 구체적인 것으로 범위를 좁히려고 하면, <상실의 시대>가 얘기하고자 하는―순전히 내 맘대로 해석한 주제이지만― 바가 떠올라 버리고, 스스로 채찍질하여 ‘같은 주제라 해도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면 되지 않겠어?’라고 생각해도, 글의 전개,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생각해내려고 하면, 내 안에서 ‘나’와 ‘나오코’, ‘미도리’ 등등이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족쇄’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너무도 내 안에 깊이 박혀버려서,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다.
상상력과 창조력의 한계라고 할까, 아니면 원래 모든 것들을 내 안에 잘 살아 숨쉬게 한다고 할까. 항상 그래왔었다. 한동안 장르 소설(특히 판타지)을 쓰려고 했을 때는―물론 지금도 쓰려고 하고 있기는 하다―, 심도 있는 주제를 써보고자 할 때는 이영도의 소설들이, 감동적인 것을 써보고자 할 때는 <하얀 로냐프 강>이, 내 상상의 한계로 존재했었다. 무엇인가를 써보려고만 하면, 내가 읽고 감동했던, 혹은 깊이 감탄했던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그 외에 다른 것은 잘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그 병세(?)가 깊다. 아니, 깊은 정도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두려움마저 존재한다. <하얀 로냐프 강>이나 <드래곤 라자>와 같은 판타지는, 아무리 멋진 주제와 감탄할만한 문체 등으로 이루어져도 현실적인 면이 상당 부분 결여되어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작가가 글을 적을 때, 환상 소설이라는 방식이 그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개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계산(?)으로 고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이 그 배경이 비현실적이라는 의미다. 배경이 환상이기에, 극복하려고하면 어느 정도는 극복해낼 수 있다. (아마도)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상실의 시대>외에도 대부분―은, 판타지와는 달리 직접 온 몸으로 느껴지는 현실적인 면들이, 나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다.
내가 ‘족쇄’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다. 완벽하게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의미다.
이 ‘족쇄’라는 것은, 하나의 벽과 같아서 내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나는 아마도 글을 쓰기 힘들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글을 전혀 쓰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만족할만하게 표현해내지 못할 것이다―는 의미다. 이 벽을 넘는 것은―즉 족쇄에서 벗어나는 것은―, 엉망일지라도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적거나, 아니면 나 자신의 내면적 깊이를 더욱 깊게 하다보면, 아니면 어떤 특정한 계기를 통해 한 순간에, 넘어지지 않을까……하고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내게 일종의 족쇄다. 하지만, 나를 방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저히 그를 싫어할 수가 없다. 이는 결코 내가 그를 존경하는 것과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zero-sum을 이루기 때문은 아니다. 그를 원망(?)하는 것도 분명히 나 자신이고, 그를 존경하는 것도 나 자신이지만, 내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단지 그러한 소설을 써낸, 그라는 한 인간 자체를 존중하기 때문―뭔가 굉장히 잘 맞지 않는 단어 선정이지만,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이다(이것이 곧 존경일 수도 있지만, 뭔가 조금 느낌이 다르다).
내가 평생 지금의 이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계속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가장 좋아할 소설가이고,
동시에 그것은 내 일생동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2004. 07. 26. 02:24 A.M.
Written by Min.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졌다고 생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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