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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던 여자는 고등학교 선배였다.
햇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좋았던 어느 늦여름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뒷산에 수업을 빼먹고 올라갔을 때였다. 특별히 문제를 일으
킨 적도 없고 특별히 교사의 주목을 받을 일도 없는 내게 그것은 일
종의 특권과도 같았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고등학생에게 가해질
수 있는 범주 내에서의 악행이 온몸을 짓누를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간단한 핑계만으로도 문제는 해결된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제 3교사는 산에 닿아있고, 교사 2층 창문을
통해서 굳이 철조망을 넘지 않고도 산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은 공공
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산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대부분의 학생과 교
사들은 아무 것도 없는 뒷산에 관심이 없다. 따라서 내부에서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가볍게 창을 넘어 뒷산에 접어든 나는 무성하게 자란
나무와 풀들을 팔로 헤치며 걸었다. 모두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
는 뒷산에는 사실 나의 보물이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
기에, 나를 제외한 타인에게 이 산은 쓸모없다. 하지만 내게는 아니
었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와 나무 사이, 그리고 그 주위에 장식된 바위
들. 그 한 가운데에 마치 쉬어가라고 뒷산이 만들어준 듯한 자리가
있었다. 겨울에조차 사방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자리다. (물론 겨
울에는 추워서 찾지 않는다) 혼자가 되고 싶은 때엔 그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보물이다.
그러나 그 날만큼은 내 보물은 내 보물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긴 머리의 여자가 누워있었다. 그녀는 내가 종종 누워
있던 자리에 마치 제 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편안한 모양새로 누워있
었다. 이 장소를 발견한지 일 년이 넘었지만, 누군가를 만난 것은 처
음이었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그 자리, 내 자리인데.” 하고 그녀에
게 말을 건 것은 어떤 의미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하지만 그녀는 눈조차 뜨지 않고 누운 자세 그대로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누웠잖아?”
“뭐, 그렇기는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왜 이 자리가 네 자
리냐고 따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단
지 먼저 왔으니 자신에게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피력했을 뿐이다.
나는 순순히 수긍하며 그녀 근처에 적당히 주저앉았다. 소위 명당
자리라는 것은 정확히 그 자리가 아니라면 다른 곳에 자리를 펴는
것만 못했지만 다른 명당을 찾기는 귀찮았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
하고 누워있는 그녀를 피해 흙과 잔디가 적당히 뒤엉킨 곳을 발로
툭툭 정리하고 주저앉았다.
지나치게 따스해서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 되어서야 “그렇
게 쉽게 포기할 거면서 왜 따진 거야?” 하고 그녀는 물었다.
앉자마자 꺼내든 담배를 다 태우고,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기에 조금 늦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번에도 선선히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 침대에 모르는 사람이 누워있는 기분이었거든.”
말을 뱉고 나서야 뜬금없는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황급
히 부연했다. “생각해봐. 최악이잖아? 비에 흠뻑 젖은 솜처럼 몸이 무
겁고 머리는 아프고, 그래도 이제 곧 집이다―라는 생각에 피곤을 참
고 집에 왔는데 들어오자마자 뛰어들려고 했던 침대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누워있단 말이지. 게다가 그 침대는 싱글 사이즈란 말이야.
이미 누가 누워있으면 내가 누울 공간은 전혀 없잖아. 이건 뭐야? 왜
내 아늑한 안식처를 멋대로 쓰고 있는 거지? 그런 기분.”
“헤에. 그런데 왜 그렇게 순순히 포기했어?”
그녀는 눈을 살짝 뜨고 나를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반쯤 열린 눈이 묘하게 매력적이어서 잠시 말을 잊었다. 그녀는
“응?” 하고 작게, 나를 일깨우듯 콧소리를 한 번 내었고 나는 조금
황망한 기분 속에서 대꾸했다.
“그 침대는 한 번도 내 소유권 주장을 인정해준 적이 없거든.”
그녀는 그대로 숨이 넘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기세로 폭소했
다. 어리둥절했다. 무엇이 그리도 웃긴 것일까. 느낀 바를 말했을 뿐
인데 세기의 걸작 유머를 듣기라도 한 듯한 그녀의 폭소는 약간의
불쾌감마저 들었다. 나는 그 불쾌감을 표출할 의도를 섞어 상체를 벌
떡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그녀는 그런 내
동작을 보더니 한층 더 즐겁다는 듯 폭소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불
쾌했다.
한참 만에 그녀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무뚝뚝한 얼굴로 바
라보는 시선을 느낀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재미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없네. 옛 상처?”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입가에 걸린 웃음을 지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과할 정도의 진지함은 때로는 무척이나 멋져 보인다는 거, 혹시
알고 있어?”
아니, 하고 대답한다. 사실이다. 알 리가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그
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조차 없으니까.
미약한 부정을 마주한 그녀는 앞머리를 가볍게 매만지며 농담이라
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나를 부둥켜안았다. 세상이 회전하는
감각과 함께 등과 땅이 만나는 감각이 찾아들었다. 꽤 푹신한 풀밭이
었지만 등이 아팠다. 얼굴을 찡그리자 그녀는 가볍게 눈웃음치며 앞
머리에 손을 뻗어왔다.
나를 짓누른 채, 그녀가 움직였다.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붙들
었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름, 알려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는 금언이 있지만 적어도 모든 상황에서 그렇지는
않다. 그녀의 침묵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행위가 끝날 때까지 들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어렸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순수했다. 아마도 그랬기 때
문이리라. 내 입에서 미처 자제하지 못한 한 마디가 더 튀어나왔던
것은.
“싫어?”
내 교복상의 위에 앉아 흩어졌던 자신의 옷을 끌어 모으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불쑥 그렇게 물었다. 담배연기가 바람을 타고 눈동자
를 괴롭혀서 따끔따끔 아팠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지독하게
도 불쾌했고 불만족스러웠다. 그러한 답답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싫어?”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웠다면 다시 묻는 것은 바르지 않다. 이미 짓
밟은 자존심을 재차 짓밟아 땅에 묻어버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런데 어째서냐고? 지금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
면 그때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
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알고 싶었다.
그래, 이어두고 싶었다.
단순한 관계.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
그 짧은 만남 이후에 이어지는 가벼운 헤어짐. 그것이 싫었다. 끝이
아닌, 시작을 만들고 싶었다. 설령 그 과정이 남자답지 못한 투정으
로 점철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 입에 물린 담배를 왼손으로 빼앗았다. 누구
의 손에 들려있어도 담배는 담배다. 더불어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 내가 들고 있던 담배다. 두 담배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
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담배 그 자체에는. 달라진 것이라면 들고 있
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고작 그 차이만으로도 그
둘은 전혀 다른 물체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그녀가 들고 있기라도 한
듯. 아니, 그녀의 손이 아니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기라도 하
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배신하듯 그녀는 담배를 입에 대지는 않았다.
대신 담배를 든 왼손 대신 오른팔 하나만으로 자신의 체중을 지탱한
채 그대로 내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움찔거렸
다. 나는 마침내 그녀가 대답해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청각에 집중했
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청각이 아니라 촉각을 자극했다.
입술이 닿았다.
짧은 순간이 지나고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입술에 와 닿았던 부드
러운 감촉의 여운에 잠시 빠져있던 나는 그녀가 몸을 완전히 일으킨
후에야 간신히 내 목에 부드러운 감촉의 천이 둘러져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먼저 갈게, 후배님.”
그녀는 흐트러진 차림으로 싱긋 웃고는 떠나갔다.
한 학년 위임을 드러내는 진청색 타이와 희미한 향기만을 남기며,
그녀는 늦여름의 햇볕이 가득 내리쬐는 풀숲 사이로 요정처럼 녹아
들었고, 사라졌다.
내가 바랐던 시작과는 달랐지만 그 만남이 끝은 아니었다. 나는 그
녀와 그 뒤로 반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더 만났다.
그녀의 성격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어설프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애매한 느낌뿐이다. 그녀는 한없이 가냘프고 여리게 흩날리지만
결코 무너지지는 않는, 진부하지만 갈대 같은 여자였다. 학업성적은
제법 우수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내게 더 가깝게 떠오르는 것은 내
담배를 종종 빼앗아 피우는 그녀의 모습이다.
거의 매일같이 그녀를 안았고, 그녀에게 안겼다. 점심시간, 방과
후, 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을 격정이나 욕망이
라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몸을 탐한 것이 아니
다. 내가 그녀를 안은 것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
이었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무엇인가에 간절하게 손을 뻗는 기분.
그것이 매번 그녀를 안을 때마다 느낀 무엇이었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조악하지만 이런 비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았다.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 해소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마치 그런 존재였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하지만 갈증
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반년 간 반복. 그리고 그녀가 졸업
함과 동시에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너도 나중이 되면 알게 될 거야.”
그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기억은 퇴색되어가고 추억은 미화되어간다고 누군가 말했다. 누구
의 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말의 절반에만 동의한다. 그
래. 기억은 퇴색된다. 그렇다면 추억은? 추억은 기억하고 있는 사실
의 아름다운 단면이다. 즉 추억은 기억이 존재함으로써, 동시에 그
기억이 미화됨으로써 존재한다. 하지만 기억이 퇴색된다면 어떻게 추
억이 남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머지 절반―추억이 미화된다는―에 점점 더 동의할 수 없어질수
록, 나는 그녀가 남겼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마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
할 것이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을까?
사람은 영원히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몸이 이어져있을지언정 나는 그녀와 생각까지 이어지지 않았기에, 나
는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가 했던 말
은 옳다. 그녀의 말이 옳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사람은 영원히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그렇게 대꾸했다. 그
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을 완벽하게 이
해할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죽은 인간뿐이다. 그렇기에 나
는 내가 그녀를 사랑했었는지 지금까지도 파악하지 못한다.
처음 만났던 여자는 고등학교 선배였다.
햇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좋았던 어느 늦여름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뒷산에 수업을 빼먹고 올라갔을 때였다. 특별히 문제를 일으
킨 적도 없고 특별히 교사의 주목을 받을 일도 없는 내게 그것은 일
종의 특권과도 같았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고등학생에게 가해질
수 있는 범주 내에서의 악행이 온몸을 짓누를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간단한 핑계만으로도 문제는 해결된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제 3교사는 산에 닿아있고, 교사 2층 창문을
통해서 굳이 철조망을 넘지 않고도 산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은 공공
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산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대부분의 학생과 교
사들은 아무 것도 없는 뒷산에 관심이 없다. 따라서 내부에서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가볍게 창을 넘어 뒷산에 접어든 나는 무성하게 자란
나무와 풀들을 팔로 헤치며 걸었다. 모두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
는 뒷산에는 사실 나의 보물이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
기에, 나를 제외한 타인에게 이 산은 쓸모없다. 하지만 내게는 아니
었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와 나무 사이, 그리고 그 주위에 장식된 바위
들. 그 한 가운데에 마치 쉬어가라고 뒷산이 만들어준 듯한 자리가
있었다. 겨울에조차 사방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자리다. (물론 겨
울에는 추워서 찾지 않는다) 혼자가 되고 싶은 때엔 그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보물이다.
그러나 그 날만큼은 내 보물은 내 보물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긴 머리의 여자가 누워있었다. 그녀는 내가 종종 누워
있던 자리에 마치 제 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편안한 모양새로 누워있
었다. 이 장소를 발견한지 일 년이 넘었지만, 누군가를 만난 것은 처
음이었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그 자리, 내 자리인데.” 하고 그녀에
게 말을 건 것은 어떤 의미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하지만 그녀는 눈조차 뜨지 않고 누운 자세 그대로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누웠잖아?”
“뭐, 그렇기는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왜 이 자리가 네 자
리냐고 따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단
지 먼저 왔으니 자신에게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피력했을 뿐이다.
나는 순순히 수긍하며 그녀 근처에 적당히 주저앉았다. 소위 명당
자리라는 것은 정확히 그 자리가 아니라면 다른 곳에 자리를 펴는
것만 못했지만 다른 명당을 찾기는 귀찮았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
하고 누워있는 그녀를 피해 흙과 잔디가 적당히 뒤엉킨 곳을 발로
툭툭 정리하고 주저앉았다.
지나치게 따스해서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 되어서야 “그렇
게 쉽게 포기할 거면서 왜 따진 거야?” 하고 그녀는 물었다.
앉자마자 꺼내든 담배를 다 태우고,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기에 조금 늦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번에도 선선히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 침대에 모르는 사람이 누워있는 기분이었거든.”
말을 뱉고 나서야 뜬금없는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황급
히 부연했다. “생각해봐. 최악이잖아? 비에 흠뻑 젖은 솜처럼 몸이 무
겁고 머리는 아프고, 그래도 이제 곧 집이다―라는 생각에 피곤을 참
고 집에 왔는데 들어오자마자 뛰어들려고 했던 침대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누워있단 말이지. 게다가 그 침대는 싱글 사이즈란 말이야.
이미 누가 누워있으면 내가 누울 공간은 전혀 없잖아. 이건 뭐야? 왜
내 아늑한 안식처를 멋대로 쓰고 있는 거지? 그런 기분.”
“헤에. 그런데 왜 그렇게 순순히 포기했어?”
그녀는 눈을 살짝 뜨고 나를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반쯤 열린 눈이 묘하게 매력적이어서 잠시 말을 잊었다. 그녀는
“응?” 하고 작게, 나를 일깨우듯 콧소리를 한 번 내었고 나는 조금
황망한 기분 속에서 대꾸했다.
“그 침대는 한 번도 내 소유권 주장을 인정해준 적이 없거든.”
그녀는 그대로 숨이 넘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기세로 폭소했
다. 어리둥절했다. 무엇이 그리도 웃긴 것일까. 느낀 바를 말했을 뿐
인데 세기의 걸작 유머를 듣기라도 한 듯한 그녀의 폭소는 약간의
불쾌감마저 들었다. 나는 그 불쾌감을 표출할 의도를 섞어 상체를 벌
떡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그녀는 그런 내
동작을 보더니 한층 더 즐겁다는 듯 폭소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불
쾌했다.
한참 만에 그녀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무뚝뚝한 얼굴로 바
라보는 시선을 느낀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재미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없네. 옛 상처?”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입가에 걸린 웃음을 지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과할 정도의 진지함은 때로는 무척이나 멋져 보인다는 거, 혹시
알고 있어?”
아니, 하고 대답한다. 사실이다. 알 리가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그
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조차 없으니까.
미약한 부정을 마주한 그녀는 앞머리를 가볍게 매만지며 농담이라
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나를 부둥켜안았다. 세상이 회전하는
감각과 함께 등과 땅이 만나는 감각이 찾아들었다. 꽤 푹신한 풀밭이
었지만 등이 아팠다. 얼굴을 찡그리자 그녀는 가볍게 눈웃음치며 앞
머리에 손을 뻗어왔다.
나를 짓누른 채, 그녀가 움직였다.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붙들
었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름, 알려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는 금언이 있지만 적어도 모든 상황에서 그렇지는
않다. 그녀의 침묵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행위가 끝날 때까지 들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어렸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순수했다. 아마도 그랬기 때
문이리라. 내 입에서 미처 자제하지 못한 한 마디가 더 튀어나왔던
것은.
“싫어?”
내 교복상의 위에 앉아 흩어졌던 자신의 옷을 끌어 모으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불쑥 그렇게 물었다. 담배연기가 바람을 타고 눈동자
를 괴롭혀서 따끔따끔 아팠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지독하게
도 불쾌했고 불만족스러웠다. 그러한 답답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싫어?”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웠다면 다시 묻는 것은 바르지 않다. 이미 짓
밟은 자존심을 재차 짓밟아 땅에 묻어버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런데 어째서냐고? 지금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
면 그때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
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알고 싶었다.
그래, 이어두고 싶었다.
단순한 관계.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
그 짧은 만남 이후에 이어지는 가벼운 헤어짐. 그것이 싫었다. 끝이
아닌, 시작을 만들고 싶었다. 설령 그 과정이 남자답지 못한 투정으
로 점철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 입에 물린 담배를 왼손으로 빼앗았다. 누구
의 손에 들려있어도 담배는 담배다. 더불어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 내가 들고 있던 담배다. 두 담배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
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담배 그 자체에는. 달라진 것이라면 들고 있
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고작 그 차이만으로도 그
둘은 전혀 다른 물체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그녀가 들고 있기라도 한
듯. 아니, 그녀의 손이 아니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기라도 하
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배신하듯 그녀는 담배를 입에 대지는 않았다.
대신 담배를 든 왼손 대신 오른팔 하나만으로 자신의 체중을 지탱한
채 그대로 내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움찔거렸
다. 나는 마침내 그녀가 대답해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청각에 집중했
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청각이 아니라 촉각을 자극했다.
입술이 닿았다.
짧은 순간이 지나고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입술에 와 닿았던 부드
러운 감촉의 여운에 잠시 빠져있던 나는 그녀가 몸을 완전히 일으킨
후에야 간신히 내 목에 부드러운 감촉의 천이 둘러져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먼저 갈게, 후배님.”
그녀는 흐트러진 차림으로 싱긋 웃고는 떠나갔다.
한 학년 위임을 드러내는 진청색 타이와 희미한 향기만을 남기며,
그녀는 늦여름의 햇볕이 가득 내리쬐는 풀숲 사이로 요정처럼 녹아
들었고, 사라졌다.
내가 바랐던 시작과는 달랐지만 그 만남이 끝은 아니었다. 나는 그
녀와 그 뒤로 반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더 만났다.
그녀의 성격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어설프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애매한 느낌뿐이다. 그녀는 한없이 가냘프고 여리게 흩날리지만
결코 무너지지는 않는, 진부하지만 갈대 같은 여자였다. 학업성적은
제법 우수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내게 더 가깝게 떠오르는 것은 내
담배를 종종 빼앗아 피우는 그녀의 모습이다.
거의 매일같이 그녀를 안았고, 그녀에게 안겼다. 점심시간, 방과
후, 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을 격정이나 욕망이
라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몸을 탐한 것이 아니
다. 내가 그녀를 안은 것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
이었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무엇인가에 간절하게 손을 뻗는 기분.
그것이 매번 그녀를 안을 때마다 느낀 무엇이었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조악하지만 이런 비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았다.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 해소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마치 그런 존재였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하지만 갈증
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반년 간 반복. 그리고 그녀가 졸업
함과 동시에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너도 나중이 되면 알게 될 거야.”
그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기억은 퇴색되어가고 추억은 미화되어간다고 누군가 말했다. 누구
의 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말의 절반에만 동의한다. 그
래. 기억은 퇴색된다. 그렇다면 추억은? 추억은 기억하고 있는 사실
의 아름다운 단면이다. 즉 추억은 기억이 존재함으로써, 동시에 그
기억이 미화됨으로써 존재한다. 하지만 기억이 퇴색된다면 어떻게 추
억이 남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머지 절반―추억이 미화된다는―에 점점 더 동의할 수 없어질수
록, 나는 그녀가 남겼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마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
할 것이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을까?
사람은 영원히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몸이 이어져있을지언정 나는 그녀와 생각까지 이어지지 않았기에, 나
는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가 했던 말
은 옳다. 그녀의 말이 옳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사람은 영원히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그렇게 대꾸했다. 그
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을 완벽하게 이
해할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죽은 인간뿐이다. 그렇기에 나
는 내가 그녀를 사랑했었는지 지금까지도 파악하지 못한다.
언젠가 썼던 단편의 재탕.
일부 수정 및 끝마무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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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난 이기지는 못하게 되었군.
그러나 지진 않을거임!! 꺼이꺼이 ㅠ_ㅠ
그나저나 참 쿨하달까나...
차갑달까나...
그치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는 동의함. 아마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 설령 비슷하게까지는 느끼더라도...
드라이할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