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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언제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빨리 물러갔다.
첫눈도 이미 지나갔고, 대학은 종강 채비에 들어섰다. 하루하루
는 정신없었지만 지나고서 생각하면 별로 바쁠 이유가 없었던 평
이한 일상. 크게 마음 쓸 일도 없고 크게 즐거운 일도 없는 그런
무료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날들이 지난다. 나는 몇 번째
인지 모를 눈이 찬찬히 내려앉는 풍경을 바라보며 벤치에서 한숨
을 쉬었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 마시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희미하게 졸음이 몰려온다.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치밀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부터였을까. 커피가 애증의 대상이 된 것은.
어째서일까. 커피가 애증의 대상이 된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날, 우리는 어째서…
“선배님! 오늘 종강 전 마지막 술자리인데 오실 거예요?”
후배가 계단 위쪽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고 외친다. 커피. 계단.
고개. 외침. 어딘지 익숙한 그 광경에 가슴 한쪽이 싸늘하다. 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저었다. 대답조차 없는 거절의 표시. 불편해하면
서도 말을 걸어오는 젊은 후배들을 보면 씁쓸하다. 불편하면 다가
오지 않으면 될 것을, 누구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인지.
들고 있던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길을 걷는다.
하늘거리는 눈송이가 캠퍼스를 수놓는다.
눈은 익숙한 풍경을 전혀 색다르고 신비한 것으로 느껴지게 만
든다. 물론 비도 그렇지만, 여름이고 겨울이고 언제나 내리는 비와
달리 짧은 기간, 특수한 상황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눈의 매
력은 마력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질리도록 본 캠퍼스의
풍경이 흰 눈이 부드럽게 내리는 모습 뒤로 한 폭의 그림처럼 배
경이 된다. 눈에 대한 대다수의 평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의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었지만
공감할 수는 없었다. 눈이 오건 비가 오건, 그 공간은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의 공간 그 자체다. 공기가 덮여있는 것과 눈이나 비로
덮여있는 것의 차이가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내리막길은 쌓여가는 눈으로 조심하지 않았다간 그대로 넘어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며
내딛었다. 틀림없이 누군가는 이 길에서 넘어지겠지. 어쩌면 이미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비탈길을 내려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겨울에 어울리는 캐롤이 벨소리로 흘러나온
다. 나는 벨소리를 들으며 잠시 감회에 잠겼다. 계절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벨소리였지만, 사실 이 벨소리는 재작년 겨울 이후 바꾸
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벨소리는 기본음으로 살아가던
내게 지긋지긋하다며 그가 바꿔준 것이었다.
나는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손에 들고 서있었다. 싸늘한 날씨가 괴로울 정도로 온몸을 짓눌러
온다. 벌써 일 년이 넘었건만 나는 그의 잔재가 아직도 내 삶의 많
은 부분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에
대한 향수를 되새기도록 만드는 동시에, 그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괴로웠다.
전화가 끊어졌다.
뒤늦게 번호를 확인한다. 전화부에 등록도 되어 있지 않은 번호
지만 한눈에 누군지 깨달았다. 마치 나처럼, 새로 도입된 앞자리를
거부하고 과거의 편린에 매달려있는 낡은 앞자리. 내가 아는 한 이
런 낡은 번호를 쓰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그 날 이후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으로 구역질이 난다.
그가 죽었다.
그는 죽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아직도 그를 잊을 수가 없다.
죽는다면, 흙 속에 파묻힌다면, 그것은 내 쪽이 어울린다. 앞이 창
창하고 희망을 올곧게 바라보며 달려가던 그가 아니라.
하지만 더 이상 그를 생각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그를 기억하는 것이 괴롭다. 연상이라는 것은 어째서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그를 떠올리고 싶을 뿐인데. 나는 그만을 생각하고
싶을 뿐인데. 어째서 그 사람의 모습을 함께 그려야만 하는가.
그 날, 우리는 어째서…
“어째서?”
때 늦은 질문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옷을 입던 그녀는 어이가 없
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다. 그녀의 표정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냐고요?”
무엇이라도 베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
“선배, 머리 나빠요?”
목소리에 격렬한 분노가 묻어난다.
아니, 하고 대답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그녀는 숨을 크
게 들이쉬고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좀 이상한 거 아니에요? 멀쩡한 얼굴로 대학을 다니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남자고, 어쨌건 알 거 다 아는 사람이잖
아요? 근데 이런 상황에, 어째서라고 묻다니 무슨 생각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참았어야 했다. 화가 난 사람에게 대
화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입에서 삼켰어야 할 그 말이, 반사적
으로 튀어나가고 말았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냐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방을 울린다.
“뭐라고 대답하면 납득할 거죠? 예전에 사귀던 남자가 갑작스럽
게 죽어서, 그 남자와 절친했던 선배에게 위로받고 싶었다고 말하
면 납득할 건가요? 비슷한 상처를 입은 남은 이들끼리 그 상처를
핥아주는 관계를 원했다고 말하면 납득하겠어요? 그도 아니면 과
거부터 줄곧 선배를 좋아했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납득해줄 거예
요? 말해 보라고요!”
그녀가 입에 담았던 것이 이유라면 오히려 납득했을 것이다. 적
어도 납득하려고 시도는 했을 것이다. 어딘지 비정상적이지만 상상
을 벗어나는 범주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질문 그 자체에,
그녀가 입에 담은 말들은 하나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담겨있
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답이 나오질 않는다.
왜 그날, 그녀는 내게 안겼을까.
어째서일까. 답이 나오질 않는다.
왜 그날, 나는 그녀를 안았을까.
어째서일까.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는 왜 내게 뒤를 맡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유언을 남긴 것일까.
어째서?
〈뒤는 선배에게 맡깁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에 그동안 애써 떠올리지 않았던 그의 유
언이 새삼 나를 공격한다. 나를 향해 손짓하는 그의 유언을, 그의
마지막 말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바라본다. 눈에 얽힌 기억을 샅샅
이 찾는다. 그래, 그랬다. 첫눈. 첫눈의 기억이 있다.
“와, 예쁘다.”
그녀답지 않게 신나하는 모습에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언제
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과, 간혹 보이는 누님, 혹은 형님 같은
분위기가 내가 인식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그런
것을 강요한 것도 아니고, 그 이외의 모습은 그녀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대상에 대한 내 기본적인 인식이 그렇게 형성되어 있
었다는 의미. 그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대상에 대해 어떤 선입관을 세우고 그 기본 형태
에서 심각하게 벗어나는 것에 대해 위화감, 혹은 괴리감을 느낀다.
나 역시 그러했던 것뿐이다.
“뭐가?” 하고 나는 한심한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탓하는 듯한 눈초리로 답했다.
“보면 몰라? 눈이지 뭐겠어.”
“그래.”
“그게 다야?” 하고 내 무심한 반응에 그녀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 역시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감정―감정이라기엔 조
금 다른 느낌이었지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녀에게서
는 찾기 힘든 반응이었다.
“음, 하얗구나.”
그녀는 한방 맞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첫눈
이잖아. 첫눈.” 하고 내게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나는 떨떠름하게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얗고
작은 알갱이들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똑바로 내리는 눈을, 아
래에서 올려다보면 묘한 기분이 느껴진다. 지금은 그 느낌을 알지
만, 그때에는 그것이 제법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잠시
고개를 든 채로 그 광경을 음미했다.
“갑자기 왜 청승이야?”
토라진 듯한 말투로 그녀는 에잇 하고 팔짱을 껴왔다. 그 바람에
나는 혼자만의 심상세계에서 벗어나 그녀의 곁으로 불려나왔고, 이
번에는 다행히 늦지 않고 그녀가 원한 반응을 되돌려줄 수 있었다.
추위로 조금 붉어진 그녀의 귓가와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옆으로 팔짱을 껴온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돌려 안았다. 따스한 느
낌이었다. 그 상태 그대로, 그녀는 내 가슴에 살짝 기대듯 몸에 힘
을 빼고는 조용히 물었다.
“담배 안 피워?”
“갑자기 왜?”
“그냥. 항상 입에 물고 있으니까.”
“그렇게 많이 피우는 건 아냐.”
“…거짓말.”
확실히 거짓말이었다.
“아아. 좋다.”
길거리는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주변을 걷는 행인들은 교
복에 학생용 코트를 걸친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힐끔
거리며 지나갔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를 바라보
건 무슨 상관일까. 품에 와 닿은 따스함은 나를 배신하지 않고 나
를 채워왔다.
나는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나는 욕을 내뱉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회상에서 나를 꺼낸 것
은 과거 내가 내뱉었던 말이다. 그때,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요. 영원에 무한히 가까운 것까지도 영원이라고 가
정하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넘치도록 많아요. 예를 들면…”
나는 그에게 뭐라고 했던가. 기억을 더듬는다.
“사랑에 대한 얘기라면 그만해두는 편이 좋을 거야. 전에도 말하
지 않았나? 나는 사랑의 영속성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인간이야.
영원이라고 믿는 것은 한 극단에 치우친 순간의 감정일 뿐이지. 그
런 어떤 ‘순간’이 지나버리면 과거에 머물러있는 그런 생각들이 부
담이 될 뿐이야.”
그는 뭐라고 했던가. 아아, 그랬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반론했다.
“형이 영속성을 부정하는 것도, 충분히 극단적인 감정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시, 전화가 울렸다.
가을은 언제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빨리 물러갔다.
첫눈도 이미 지나갔고, 대학은 종강 채비에 들어섰다. 하루하루
는 정신없었지만 지나고서 생각하면 별로 바쁠 이유가 없었던 평
이한 일상. 크게 마음 쓸 일도 없고 크게 즐거운 일도 없는 그런
무료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날들이 지난다. 나는 몇 번째
인지 모를 눈이 찬찬히 내려앉는 풍경을 바라보며 벤치에서 한숨
을 쉬었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 마시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희미하게 졸음이 몰려온다.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치밀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부터였을까. 커피가 애증의 대상이 된 것은.
어째서일까. 커피가 애증의 대상이 된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날, 우리는 어째서…
“선배님! 오늘 종강 전 마지막 술자리인데 오실 거예요?”
후배가 계단 위쪽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고 외친다. 커피. 계단.
고개. 외침. 어딘지 익숙한 그 광경에 가슴 한쪽이 싸늘하다. 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저었다. 대답조차 없는 거절의 표시. 불편해하면
서도 말을 걸어오는 젊은 후배들을 보면 씁쓸하다. 불편하면 다가
오지 않으면 될 것을, 누구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인지.
들고 있던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길을 걷는다.
하늘거리는 눈송이가 캠퍼스를 수놓는다.
눈은 익숙한 풍경을 전혀 색다르고 신비한 것으로 느껴지게 만
든다. 물론 비도 그렇지만, 여름이고 겨울이고 언제나 내리는 비와
달리 짧은 기간, 특수한 상황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눈의 매
력은 마력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질리도록 본 캠퍼스의
풍경이 흰 눈이 부드럽게 내리는 모습 뒤로 한 폭의 그림처럼 배
경이 된다. 눈에 대한 대다수의 평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의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었지만
공감할 수는 없었다. 눈이 오건 비가 오건, 그 공간은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의 공간 그 자체다. 공기가 덮여있는 것과 눈이나 비로
덮여있는 것의 차이가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내리막길은 쌓여가는 눈으로 조심하지 않았다간 그대로 넘어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며
내딛었다. 틀림없이 누군가는 이 길에서 넘어지겠지. 어쩌면 이미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비탈길을 내려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겨울에 어울리는 캐롤이 벨소리로 흘러나온
다. 나는 벨소리를 들으며 잠시 감회에 잠겼다. 계절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벨소리였지만, 사실 이 벨소리는 재작년 겨울 이후 바꾸
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벨소리는 기본음으로 살아가던
내게 지긋지긋하다며 그가 바꿔준 것이었다.
나는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손에 들고 서있었다. 싸늘한 날씨가 괴로울 정도로 온몸을 짓눌러
온다. 벌써 일 년이 넘었건만 나는 그의 잔재가 아직도 내 삶의 많
은 부분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에
대한 향수를 되새기도록 만드는 동시에, 그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괴로웠다.
전화가 끊어졌다.
뒤늦게 번호를 확인한다. 전화부에 등록도 되어 있지 않은 번호
지만 한눈에 누군지 깨달았다. 마치 나처럼, 새로 도입된 앞자리를
거부하고 과거의 편린에 매달려있는 낡은 앞자리. 내가 아는 한 이
런 낡은 번호를 쓰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그 날 이후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으로 구역질이 난다.
그가 죽었다.
그는 죽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아직도 그를 잊을 수가 없다.
죽는다면, 흙 속에 파묻힌다면, 그것은 내 쪽이 어울린다. 앞이 창
창하고 희망을 올곧게 바라보며 달려가던 그가 아니라.
하지만 더 이상 그를 생각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그를 기억하는 것이 괴롭다. 연상이라는 것은 어째서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그를 떠올리고 싶을 뿐인데. 나는 그만을 생각하고
싶을 뿐인데. 어째서 그 사람의 모습을 함께 그려야만 하는가.
그 날, 우리는 어째서…
“어째서?”
때 늦은 질문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옷을 입던 그녀는 어이가 없
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다. 그녀의 표정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냐고요?”
무엇이라도 베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
“선배, 머리 나빠요?”
목소리에 격렬한 분노가 묻어난다.
아니, 하고 대답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그녀는 숨을 크
게 들이쉬고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좀 이상한 거 아니에요? 멀쩡한 얼굴로 대학을 다니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남자고, 어쨌건 알 거 다 아는 사람이잖
아요? 근데 이런 상황에, 어째서라고 묻다니 무슨 생각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참았어야 했다. 화가 난 사람에게 대
화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입에서 삼켰어야 할 그 말이, 반사적
으로 튀어나가고 말았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냐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방을 울린다.
“뭐라고 대답하면 납득할 거죠? 예전에 사귀던 남자가 갑작스럽
게 죽어서, 그 남자와 절친했던 선배에게 위로받고 싶었다고 말하
면 납득할 건가요? 비슷한 상처를 입은 남은 이들끼리 그 상처를
핥아주는 관계를 원했다고 말하면 납득하겠어요? 그도 아니면 과
거부터 줄곧 선배를 좋아했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납득해줄 거예
요? 말해 보라고요!”
그녀가 입에 담았던 것이 이유라면 오히려 납득했을 것이다. 적
어도 납득하려고 시도는 했을 것이다. 어딘지 비정상적이지만 상상
을 벗어나는 범주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질문 그 자체에,
그녀가 입에 담은 말들은 하나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담겨있
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답이 나오질 않는다.
왜 그날, 그녀는 내게 안겼을까.
어째서일까. 답이 나오질 않는다.
왜 그날, 나는 그녀를 안았을까.
어째서일까.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는 왜 내게 뒤를 맡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유언을 남긴 것일까.
어째서?
〈뒤는 선배에게 맡깁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에 그동안 애써 떠올리지 않았던 그의 유
언이 새삼 나를 공격한다. 나를 향해 손짓하는 그의 유언을, 그의
마지막 말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바라본다. 눈에 얽힌 기억을 샅샅
이 찾는다. 그래, 그랬다. 첫눈. 첫눈의 기억이 있다.
“와, 예쁘다.”
그녀답지 않게 신나하는 모습에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언제
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과, 간혹 보이는 누님, 혹은 형님 같은
분위기가 내가 인식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그런
것을 강요한 것도 아니고, 그 이외의 모습은 그녀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대상에 대한 내 기본적인 인식이 그렇게 형성되어 있
었다는 의미. 그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대상에 대해 어떤 선입관을 세우고 그 기본 형태
에서 심각하게 벗어나는 것에 대해 위화감, 혹은 괴리감을 느낀다.
나 역시 그러했던 것뿐이다.
“뭐가?” 하고 나는 한심한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탓하는 듯한 눈초리로 답했다.
“보면 몰라? 눈이지 뭐겠어.”
“그래.”
“그게 다야?” 하고 내 무심한 반응에 그녀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 역시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감정―감정이라기엔 조
금 다른 느낌이었지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녀에게서
는 찾기 힘든 반응이었다.
“음, 하얗구나.”
그녀는 한방 맞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첫눈
이잖아. 첫눈.” 하고 내게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나는 떨떠름하게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얗고
작은 알갱이들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똑바로 내리는 눈을, 아
래에서 올려다보면 묘한 기분이 느껴진다. 지금은 그 느낌을 알지
만, 그때에는 그것이 제법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잠시
고개를 든 채로 그 광경을 음미했다.
“갑자기 왜 청승이야?”
토라진 듯한 말투로 그녀는 에잇 하고 팔짱을 껴왔다. 그 바람에
나는 혼자만의 심상세계에서 벗어나 그녀의 곁으로 불려나왔고, 이
번에는 다행히 늦지 않고 그녀가 원한 반응을 되돌려줄 수 있었다.
추위로 조금 붉어진 그녀의 귓가와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옆으로 팔짱을 껴온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돌려 안았다. 따스한 느
낌이었다. 그 상태 그대로, 그녀는 내 가슴에 살짝 기대듯 몸에 힘
을 빼고는 조용히 물었다.
“담배 안 피워?”
“갑자기 왜?”
“그냥. 항상 입에 물고 있으니까.”
“그렇게 많이 피우는 건 아냐.”
“…거짓말.”
확실히 거짓말이었다.
“아아. 좋다.”
길거리는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주변을 걷는 행인들은 교
복에 학생용 코트를 걸친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힐끔
거리며 지나갔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를 바라보
건 무슨 상관일까. 품에 와 닿은 따스함은 나를 배신하지 않고 나
를 채워왔다.
나는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나는 욕을 내뱉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회상에서 나를 꺼낸 것
은 과거 내가 내뱉었던 말이다. 그때,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요. 영원에 무한히 가까운 것까지도 영원이라고 가
정하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넘치도록 많아요. 예를 들면…”
나는 그에게 뭐라고 했던가. 기억을 더듬는다.
“사랑에 대한 얘기라면 그만해두는 편이 좋을 거야. 전에도 말하
지 않았나? 나는 사랑의 영속성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인간이야.
영원이라고 믿는 것은 한 극단에 치우친 순간의 감정일 뿐이지. 그
런 어떤 ‘순간’이 지나버리면 과거에 머물러있는 그런 생각들이 부
담이 될 뿐이야.”
그는 뭐라고 했던가. 아아, 그랬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반론했다.
“형이 영속성을 부정하는 것도, 충분히 극단적인 감정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시, 전화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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