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써봅니다.
몸풀기용..이라기엔 좀 과해지는 기분이 들지만, 아무튼.
마지막 도서관(1) 읽기
인간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한다. 머저리 같은 짓이다.
- 머저리로 유명했던 드워프 족장,
크라누스 뮐러의 말
최후의 탑.
1. 마지막 도서관 (1)
먼 곳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낯설었다.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가 목을 울리는 듯한 숨막히는 바람이었다. 짙
은 고동색으로 칠해진 고풍스러운 서쪽 창문이 삐걱거리며 몸서리친다.
멀리 서쪽 하늘을 짓누른 먹구름이 드래곤의 숨결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퍼부을 날씨네."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으며 네에릴이 말했다. 아직 비가 내리지는 않
았지만 건물 안까지 침범한 습기로 주변을 울리는 공기가 눅눅해져 있었
다.
"그렇군요. 르마의 계절이 돌아오려나 봅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지만 그 안에 소속된 이들은 모두들 마지막 도서관
이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이엘카는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평상시와 변
함없는 차분한 말투였다. 하지만 네에릴은 이엘카의 비유에 지긋지긋하다
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 주제에 엘프의 신을 비유하는 건 그만두지 그래?"
"르마의 계절은 수 세기 전 여름 장마철을 비유하는 뜻으로 종종 쓰이
던 단어입니다. 특별히 엘프의 신을 비유하려던 건 아닙니다. 뭐, 어쨌거
나 불쾌하게 들리셨다면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네에릴은 칫, 하고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십니까?"
"남이사."
네에릴은 매몰차게 대꾸하며 문을 벌컥 열고 복도로 나왔다. 쿵쾅거리
며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발소리가 고요한 도서관을 진동케했다. 4층까지
단숨에 올라간 네에릴은 이 고풍스러운 도서관 내에서도, 유독 고풍스럽
게 치장된 두꺼운 문을 발로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관장님, 제발 저놈 좀 쫓아내자고요!"
반복되는 일상은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네에릴의 목소리는 용의 화통
을 삶아먹은 것 같은 고음이었지만 매커일 관장은 덥수룩한 수염을 쓸며
유유히 대꾸했다.
"왜?"
"왜냐고요? 엘프의 건물에 인간이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잖아
요!"
"드워프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건물이다. 유념하거라."
"그 땅강아지들의 노력 따위는 관심 없어요. 제 관심사는 이엘카 놈을
쫓아내는 거라고요!"
신이 내린 손재주를 타고난 땅의 종족들을 땅강아지로 폄하하며 네에
릴이 짜증을 표출했다. 하지만 사흘이 멀다하고 발작적으로 외쳐대는 네
에릴의 모습을 수십 년째 지켜본 매커일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녀의 말
을 거부했다. 고작 한 마디로.
"싫다."
반복. 그것이 문제다. 행위의 반복은 인간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 불
변의 진리가 통하지 않는 엘프가 매커일의 눈앞에 있었다. 그 엘프가 목
청을 높이며 소리쳤다.
"왜요? 인간 주제에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이엘카 놈을 왜 여기
에 계속 둬야하죠? 그 녀석은 인간이에요. 이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
라고요!"
"그러는 너는 어떤지 생각해봐라. 엘프 특유의 침착함은 삶아먹기라도
한 것처럼 폭급하구나. 엘프답지 않은 엘프가, 엘프-드워프 건설단이 지
은 이 건물에 계속 머물러도 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네에릴은 한순간 움찔했다. 그녀는 이내 상투적이고 동어반복적인 핑계
를 찾아내었다.
"저는 엘프잖아요!"
"엘프를 정의하는 것이, 종족의 생물학적 특성이라고 생각하느냐?"
맙소사. 네에릴은 입을 다물었다. 매커일은 요하네스 루어의 말을 인
용하고 있었다.
엘프답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 수십 년 이상을 이 마지막 도서관에서
머물렀다. 이 공간은 사방에 널려있는 책을 들춰보는 것 외에는 변변한
소일거리조차 없는 공간이다. (불변하기 때문에 먼지조차 쌓이지 않으므
로) 따라서 그녀 역시 요하네스 루어의 저서를 읽어봤으며, 그가 주창한
기괴한 가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유사인간은 그 종족의 생
물학적 특성에 의해 그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사
회적인 특성에 의해서만 구분된다>는 주장이었다.
"그 작자는 사기꾼이에요. 전부 허튼소리라고요. 그의 주장처럼 생물학
적 특성이 아니라 사회적 특성에 의해서 유사종족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면 애초에 르마께서 그토록 많은 종족을 만드셨겠어요? 인간들이 땅을
가르고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겠죠. 생각해보세요.
숲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채식주의자들이 엘프와 같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그들은 보통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지."
화식을 금하고 채식, 혹은 생식을 하는 인간들이 남들보다 오래 산다
는 건 이미 밝혀지진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오래 사는 것에 목을 매는
일부 인간들이 고기 대신 풀을 뜯기 시작했다는 것도 이제는 특별히 신
기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보다 큰 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너를 엘프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보다 평균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가 엘프인 것도 아니지. 심지
어, 우리가 정령들과 교분을 맺고 있다는 사실조차 우리가 엘프라는 증명
이 되지는 않는다. 엘프가 엘프인 것은, 엘프답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고리타분한 얘기는 그만두세요. 관장님이 왜 여기에서 남은 생을 허비
하고 있는지, 기억은 하시는 거에요? 관장님의 그런 논리를 모두가 수용
할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이번에는 매커일이 입을 다물었다. 네에릴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매커
일의 침묵을 만끽했다. 매커일은 긴 침묵 끝에 말했다. 네에릴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그만 가보거라."
관장실의 문을 닫고 나온 네에릴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매
커일과의 말싸움에서 승리했다. 적어도 그녀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
지만 매커일의 마지막 말과 눈빛은, 부정하려해도 이 싸움에서 패배한 건
그녀 자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견디지 않았다.
"썅!"
도저히 엘프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욕설과 함께, 복도
에 놓여있던 화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
만 후련하기는 했다. 네에릴은 투덜거리며 터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계단
을 내려왔다. 도서관에서는 정숙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키지
않는 행위였지만 그녀는 벌레를 무시하듯 그런 규칙을 무시했다. 기본적
으로 터무니 없는 이유는 아니었다. 이 도서관에는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다>.
설렁설렁 1층까지 내려온 그녀는 손잡이를 돌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다시 이엘카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순간적으로 껄끄러웠던 것이다. 하
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흥. 내가 언제부터 그놈을 신경 썼다고."
네에릴은 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벽을 걷어찼다. 네에릴은 '다녀오셨습니까' 따위
의 말을 던지는 이엘카를 향해 뭐라고 쏘아붙일지 고민하며 안으로 들어
섰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을 때까지, 이엘카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
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이상한 일이었다.
"…이엘카?"
네에릴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이엘카를 찾았다. 하지만 방안에
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네에릴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춰
책상 아래를 살펴보았다. 책 몇 권이 바닥에 떨어져있었지만 그녀가 원하
던 것-이엘카-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나."
네에릴은 일부러 소리를 내서 말했다. 먼 곳에서 불던 바람이 어느새
지척까지 가까워져있었다. 창문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부
서질 것처럼 몸부림쳤고 지척에서 드래곤이 울부짖는듯한 굉음이 도서관
밖을 강타했다.
네에릴은 흑백으로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책
몇 권이 도서관 안쪽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네에릴은 조심스럽게 도서관
안쪽을 향해 다가섰다. 그녀는 이엘카를 강박적으로 싫어했지만, 수십 년
간 함께 지내다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
다. 이엘카가 바닥을 뒹굴고 있는 책을 정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엘카! 어디야!"
책을 향해 다가서던 그녀의 발이 철벅, 하고 카펫에 빠져들었다. 카펫
이 젖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창문이 열려 비바람이라도 들이쳤나? 네에릴
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천장과 가까운 창문을 살펴보았다. 창문은 바람에
맞서 움찔거리고 있었지만 굳건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쾅! 다시 벼락이
내리꽂히며 시야가 번쩍였다. 그리고 흑과 백으로 번쩍이는 시야 속에서,
네에릴은 경악했다. 비에 젖었다고 생각한 바닥. 그녀의 발에 달라붙은
것은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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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읽었습니당! 뒷편은 나오나요?
어쩌면?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