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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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솟구친다. 하지만 동시에 가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뒤따른다. 그것은 예의일 것이다. 이 나라에, 이 사회에, 어
쩌면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예의, 혹은 도덕. 하지만 가고
싶지 않다.
몇 번 입어본 적도 없는 검은 정장을 꺼내본다. 먼지가 조금 내려
앉기는 했지만 거의 새것과 다름없다. 입은 횟수를 손으로 꼽을 정도
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정장을 옷걸이에 걸려있는 채로 침대 위에 던져놓고 다시 담배를
문다. 애써 바깥에서 담배를 태운 스스로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짓거
리지만 견딜 수가 없었다.
관계는 책임을 동반한다.
관계를 기피할 정도로 절감하고 있는 명제다. 그렇기에 가야만 한
다. 하지만 도저히 가고 싶지 않았다. 한참 타고 있는 담배를 물고
바깥으로 나온다. 말리지 않은 머리에 와 닿는 바람이 싸늘하다.
비교적 한적한 동네다. 한적하다고 할까, 메말랐다고 할까. 골목길
안쪽으로도 끝도 없이 늘어선 아파트의 산은 어딘지 착잡한 기분마
저 불러일으킨다.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들의 사
이를 걷는 기분은 끔찍하다. 한 걸음, 한 호흡마다 돌덩어리를 씹어
삼키는 듯한 기분이다.
한참을 걸었지만 가슴은 점점 더 무거워질 뿐이다. 관계는 책임을
동반한다. 책임을 져야만 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선다. 이런 기분에 대
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피곤한 노릇이다. 타인과 닿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 짜증을 억누르며 택시를 잡아탄다. 메마른 목소리로 목적
지를 고하자 기사는 힐끗 나를 돌아본다. 그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다. ‘젊은 놈이 버릇이…’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 속에서 노기를 비
애가 대신한다. 참으로 뻔한 이유다. 그의 눈길이 위아래를 훑는다.
검은 정장에 특히 오래도록 시선이 닿았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 차를
출발시킨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넌 여전하구나.”
수없이 듣는 말이다. 무엇이 여전하다는 것일까. 여전하다는 말은
전前과 같다如는 말이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가식적인 미
소를 짓고 나를 향한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상대의 이름은 알
고 있다. 언제 만났는지도 알고 있다. 1, 2년 정도 같은 강의실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예전의 나, 라는 것은 결국 그 당시에는 현재의 나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현재의 나’가 어땠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 사람
은 누구도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으니까. 과거―그 당시의 현재―에
이해하지 못한 것을 지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상대방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한다.
“넌 여전하구나.”
반박할 말을 찾아본다. 하지만 그 시도는 이내 조용히 사그라진다.
그의 말에 반박하려면 그 기반이 되는 논리부터 설파해야한다. 하지
만 나는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를 논리적으로 납득시키
는 과정은 더 없이 어렵다.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좋다)
나는 체념하고 앞에 놓인 잔을 비웠다. 상대는 한가로운 세상 얘기
를 몇 마디 늘어놓다가 대화 상대가 시원찮다는 것을 깨달은 듯 적
당히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떴다. 그제야 나는 해방된 기분을
느끼며 주위를 다시 둘러본다.
시커멓다. 식장의 소감은 그렇게 형용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 같이 시커먼 옷을 입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우울한 몸짓으로 움직인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시커멓다.
똑같은 마음인 척, 똑같은 기분인 척, 똑같은 생각인 척.
시커먼 군집이 하나 되어 움직인다. 혐오스러울 정도다. 그들 모두
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들 중 진심으로 이곳에 온
이는 얼마나 될 것인가.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나는 그 시커먼 군집의 몸짓 속에서 하염없이 과거를 되새긴다. 조
심스럽게, 망가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아직 퇴색되지 않은 과거를 더
듬는다.
“형. 형은 뭐가 하고 싶어요?”
어느 날이었던가. 점심을 먹다말고 그는 뜬금없이 그렇게 물었다.
“글쎄다. 나도 그게 궁금해. 애초에 영문과를 나와도 마땅히 정해
진 진로가 없다는 게 골치 아프니까. 열려있는 길이 지나칠 정도로
광활하잖아? 어릴 때라면 그런 길이 좋지만, 커서는 그 광활함이 막
막함으로 느껴져.”
“아니, 그런 말은 아닌데. 그런 건 굳이 묻지 않아도 다들 느끼고
고민하는 문제잖아요. 그렇게 고민하다가 태반이 그냥 취직하고, 아
니면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그렇지. 근데 난 그러고 싶진 않은데. …어린애 투정 같다는 건 알
고 있지만.”
“어째서요?”
“응?” 하고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는 “어째서 그게 어린애 투
정이에요?” 라고 다시 물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솔직한 눈
빛에 나는 조금 부담스럽다는 생각마저 느끼며 찬찬히 말을 정리하
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특별히 내가 하고 싶은 ‘무엇’도 없으면서, 그저 모두가 그렇게 삶
에 쫓겨 가는 길은 가고 싶지 않다, 라는 뜻이잖아. 이거하라 그러면
저걸 하고 싶어 하고, 뭘 줘도 항상 불평하는 어린애 같으니까.”
“꼭 그렇진 않아요. 특별히 하고 싶은 ‘무엇’은 없어도, 그것을 찾
지 못한 자신이 싫어서, 찾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걷진 않겠다.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
아요?”
“…너,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야 물론 존경할만한 선배죠.”
그는 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웃음이 부담스러워 그
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는 그런 나를 향해 조금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도 형.”
“왜?” 나는 멈췄던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고 싶은 게 없으면, 연애를 해봐요.”
“연애?”
“네. 연애요. 사랑. 러브. 아이(愛)!”
“오버하지 말고. 밥 잘 먹다말고 갑자기 무슨 이상한 소리야?”
“너무하네. 전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나는 국을 뜨던 숟가락을 놓고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진지하긴 뭐가 진지해? 내가 연애에 별 관심 없는 건 너도 잘 알
잖아. 귀찮기만 하다고, 그런 건.”
“어째서 귀찮아요? 연애가 얼마나 행복한데. 인생이 장밋빛이라는
수식어는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정말정말 잘 만든 말이라고 생각하
는데.”
“장미 중엔 백장미도 있어. 허연 색인가보지.”
그는 나를 질렸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뭐야, 그 한숨은.” 하고 나는 투덜거렸다.
“정말 너무해요, 선배는.”
“…이럴 때만 선배냐.”
“대체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어요. 여자도 결국 우리랑 똑
같은 생물이에요. 기겁하고 피할 벌레도 아니고, 무서워할 정도로 거
룩한 존재도 아니라고요.”
“알아, 그런 건.”
“그럼 대체 왜?”
나는 대답 대신 반도 넘게 남은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얼굴
을 찡그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잔반을 버리고 매점에서 뜨거운
캔커피 둘을 사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인적이 드문 벤치에 앉아 옆에
앉은 그에게 커피를 건네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때까지 그는 조금
토라진 표정을 지으면서도 재촉하지 않고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
다.
“그렇게 정해져있으니까.”
“예?”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있다고. 나는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
할 수 없어. 정확하게 표현한 말은 아니지만 대충 그렇게 옮길 수 있
겠군.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은 타인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없는 법이야.”
그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역시…” 라고 중얼거렸다. 무엇이 ‘역
시’인가? 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의 중얼거림을 지적하는 대신 말을
이었다.
“무엇인가를 애타게, 간절히 원해본 기억도 별로 없을뿐더러 애초
에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인가는 결코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사랑 같은 건 결국 호르몬의 이상 작용일 뿐이야. 그런 생리학적 변
화가 사라지는 순간 ‘소중한 누군가’가 아닌, ‘귀찮은 누군가’만 남겠
지. 사랑이란 결국 착각이라고.”
“그럼 저는요? 사랑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누구도 소중하게 생각
할 수 없다면 저도 있거나 없거나 별로 상관없는 거예요? 선배한테
는.”
그때, 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랬는지 진저리
쳐질 정도로 잘 안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내게….
과거를 더듬던 나를 향해 나이든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침울한 표
정이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는 표현은 그녀를 위해 만든 것일까. 그
녀는 천천히 다가와 맞은편에 앉는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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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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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