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포스팅이 너무 없어서, 예전에 썼던 습작 하나로 땜빵. 예전 시드에서 단편 공모할 때 하룻밤 꼬박 써서 출품해봤었는데, 결과는 당연히(笑) 떨어졌지요. 그 이후에 첨삭을 좀 받았기에 수정할까-도 생각해봤었지만 그냥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냥 과거의 기록 삼아서. 결정적으로 귀찮아요.
라노베 풍으로 써보겠다고 썼던 문투가, 지금 보니 오글거리네요. (...)
Welcome 읽기
0.
― ON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속으로 자문해본다. 당연히 답은 없다.
해리성정체감장애. 쉽게 풀어쓰자면 이중―다중―인격이라는 것은,
보통의 경우 쉽게 접할 수 없다.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얘
기라는 뜻이다. 다중 인격을 가진 소녀가 각각의 인격에서 발산되는 특
수한 능력을 통해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괴이한 사건을 해
결해가는 얘기는 말 그대로 꿈같은 소리다.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접할 수 있다는 '현상'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그리고 물론,
나는 하나의 인격만을 가진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자문할 수밖에 없다.
왜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거지?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주하고 싶어진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괴상한 천 꾸러미에 틀어 막힌 입에서 새어나
오는 건 비명도 언어도 아닌 괴이한 신음뿐이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몸으로 버둥거려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몸이 묶여있는 의자가
달싹거리며 삐거덕거리는 소리뿐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불필요하게 눈
앞에 있는 현상의 주의를 끌고 만다.
"괜히 발악하지 말아주시겠습니까? 어차피 귀하의 차례도 머지않았
습니다. 불필요한 행동은 소음을 만들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소음은
예술에는 불필요합니다. 모든 예술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볼까요? 별 것 아닌 소음 하나가 아름다운 곡 전체를 망쳐버릴 수
있습니다. 미술은 어떻습니까? 세계적인 거장이 마지막 한 획을 내려
그으면 완성될 걸작을, 끔찍한 소음이 방해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상
상만으로도 끔찍한 일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은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러니 예술을 망치는 짓은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오래도록 남을 걸작을, 당신의 저질스러운 발악으로 이 도시에 걸린 수
많은 허섭스레기로 전락시킬 셈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눈앞에서 끈적거리는 토끼가 담담하게 내뱉는다.
작고 귀여운 토끼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끼 인형에 가깝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토끼를 작게 축소한 사이즈라면 이해하기
쉬울까. 훈계를 늘어놓으며 가볍게 흔들어대는 앞발에는 외눈안경이 들
려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더욱 그런 식으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
다.
하지만 토끼―인형―의 모습은 그것만이 아니다. 앨리스의 토끼는
하얗다. 정장을 차려입었다거나 회중시계를 주기적으로 꺼낸다거나 하
는 특징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흰 토끼'의 가
장 핵심적인 특징은 하얗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인형은 그 특징을
갖추고 있지 않다.
토끼는 붉은 빛이 얼룩덜룩한 앞발을 흔들며 다시 말한다.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귀하가 바라는 소박한 꿈을 현실에 끌어들
이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쉽다고 할 수 있습니
다. 단지, 약간의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조금 불편하시리라 생각합니
다만 방해를 싫어하는 건 제 성격이라서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온힘을 다해 외쳐보지만 틀어 막혀버린 입에서 새어나오는 건 신음
뿐이다. 토끼는 길게 뻗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이건 예술이란 말입니다. 귀하에겐 아무리
감사를 드려도 모자랍니다. 하지만 예술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건 예술
가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눈알만큼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고 표현하
면 이해하시겠습니까? 물론 부당이득을 취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귀
하의 소망을 들어드리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저한의 보상입니다. 귀하의 소박한 꿈. 한없이 한심하지만
들어드릴 수밖에 없는 작은 꿈. 그것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시고 저를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온몸을 뒤틀며 신음과 저주를 퍼붓는다. 하지만 토끼는 낄낄거리며
몸을 돌린다. 그리고 앞발에 들린 외눈안경을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가
볍게 휘두르며 덩실거린다.
토끼의 눈앞에 누워있던 소녀의 몸이 기이한 소리와 함께 서서히 몸
을 일으킨다. 외눈안경이 한번 흔들리자 소녀의 팔이 앞으로 뻗는다.
토끼가 덩실거리며 바닥을 구르자 소녀의 다리가 움직인다. 토끼가 춤
을 추자 소녀의 몸도 토끼의 움직임을 따른다.
춤을 추는 소녀의 눈빛은 공허하다. 소녀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 액
정에 「당신은 이상한 나라에 있습니다(You are in WonderLand).」라
는 글자가 깜빡인다.
공허한 목소리로 소녀가 선언한다.
"요정은 있어."
― OFF
1.
"요정은 있어."
소녀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린다. 동그란 눈은 어린 시절과 다
름없이 반짝거리지만 목소리에 자신이 없는 것은 예전과는 다른 모습
이다. 한없이 어렸던 시절의 소녀는 눈을 빛내며 동네가 떠나가도록 요
정이 있다고 우기곤 했다.
소녀는 대답 없는 나를 바라보며 한층 고집스러운 얼굴로 되풀이한다.
"요정은 있어."
"이 대화, 슬슬 질리지 않아?"
"질리다니? 뭐가?"
시침 뚝 떼며 휘파람을 부는 소녀의 모습이 귀엽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귀여움에 반한 인간이 나 하나일 것이라는 망상적인 예상은 하지
않는다. 실제로 러브레터도 여러 통 받고 있는 모양이다. 뭐 이 녀석에
게 러브레터를 보내오는 놈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두 명이 아니었
으니 이젠 익숙하다. 질투를 하고 말고의 레벨이 아니다. 러브레터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저글링이고 나는 여유롭게 바라보는 캐리어다. 한
심하게 들리는 비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문학적 소양이 없는 것은
수많은 내 단점 중의 하나다) 이 녀석이 하루에 수백 통의 러브레터를
받더라도 나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물론 아무 근거도 없는 건 아니다. 이런 자만심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잘난 점이라고는 개미만큼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뽐낼 수 있는
건 이런 점뿐이다) 소녀에게 '요정'의 얘기를 들은 것이 아직은 나뿐이
다.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다른 녀석들
보다 한걸음 앞서있는 결정적인 점이다.
여자애들에겐 관심이 없고 남자애들에게는 질투를 받는다. 친구라고
부를만한 인물이 눈앞의 이 녀석밖에 없는 건 너무 잘난 친구를 둔 내
업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자니 소녀는 킬킬거리며 다시 말한다.
"생각해봐. 전 세계에 요정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형태나
모양, 혹은 표현을 달리했어도 그 이야기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모두 똑
같아. 전부 요정에 대한 이야기잖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요정의 존
재를 긍정하는데 요정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어?"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근거 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건 변함없다.
그 근거 없는 얘기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건 나의 일이다.
"요정의 부재를 긍정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건 알고 있어?"
몇 번째 반복하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레퍼토리를 입 밖으로 꺼
내는 건 어쩐지 부끄럽다. 슬슬 새로운 레퍼토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질
려버리지 않을까.
소녀는 그런 반론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대답한다.
"흥. 그럴 줄 알고 다른 얘기를 준비해왔어. 이번엔 무려 이 나라의
얘기라고!"
"말해봐. 전부 부정해줄게."
딱딱한 대답에 소녀가 볼을 부풀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음을 이 녀석은 알고 있을까.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 그 이름도 유명한…"
"그 이름도 유명한…?"
"우렁 각시!"
"…우렁 각시?"
뭔가 참신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약간 실망해버렸다.
"그래. 우렁 각시! 어수룩한 농부가 오전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밥이
되어있고 다시 오후 일을 하고 오면 설거지는 물론이고 저녁밥도 되어
있고! 자고 일어나면 아침이 차려져있고…. 전통적 관념에 맞춰서 '각시
'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전형적인 요정의 행태랑 똑같잖아. 이 나라에도
옛날부터 요정이라고 불릴 만한 존재가 있었음을 소수의 사람들은 깨
닫고 있었던 거야! 그들의 이야기가 적당히 각색되고 통념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얘기로 변형된 거지."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내가 할 말은 뻔하다.
"그거, 결국 구둣방 요정이랑 같은 얘기잖아."
소녀의 입이 쩍 벌어진다.
이 녀석은 항상 이렇다. 이것저것 찾아오는 자료의 방대함이나 세밀
함을 살펴보면 바보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똑똑한 편이다. 헌
데 누가 봐도 쉽게 알아차릴 연관성이나 유사성을 놓치는 일이 많다.
구둣방 요정이나 우렁 각시나,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비슷한 이야기
다.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을 돕는 요정의 행태. 하지만 눈에 띄면 안 되
는 그들의 정체. 전통 설화니 뭐니 해도, 결국 따져보면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동화나 설화의 유형은 대부분 비슷하다.
준비해온 일격이 일 분만에 격파된 충격으로 소녀는 머리를 감싸 쥐
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잘 정돈된 머리가 헝클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이런 격렬하게 활기찬 모습이 귀여운 건
사실이다.
그때였다.
"어머. 흥미로운 얘기를 구석에서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재밌고 신
나는 얘기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편이 좋지 않겠니? 구석
에서 시시덕거리는 건 연인 사이의 밀어로 충분하단다."
갑자기 들려온 농염한 목소리에 흠칫거린다. 깜짝 놀라며 돌아보니
늘씬한 여성이 높은 굽의 구두를 또각거리며 다가온다.
"여, 연인 같은 거 아니에요!"
아, 실수했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부정해버린 내 자신이 한심하다. 흘끔거리며 눈
치를 살핀다. 곁에서, 한껏 볼을 부풀리며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왜 화를 내는 걸까.
이런 관계를 대체 뭐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까.
말을 걸어온 선생님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연상은 누구에게나 자유롭고 망상은 더욱
자유롭다.
소꿉친구라는 허울 좋은 포장 이외에, 대체 우리 둘의 관계는 무엇
일까. 스티커처럼 서로에게 딱 달라붙어있지만 엄연히 사귀는 사이는
아니다. 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이 녀석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한다. 몹시. 하지만 연인이라는 단어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일선을 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요정 때문인가?
사사건건 부딪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요정의 존재다.
생각해보면 요정을 믿었던 것은 내 쪽이 먼저다. 이 녀석은 어디까
지나 내가 요정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은 이후에 나보다 빠져버
린 케이스일 뿐이다. 어쩌다보니 입장이 역전되어버렸지만 처음에는 그
랬다.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께 맡겨졌을 때, 요정의 존재는
나에게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요정을 믿다니, 어린 날의 한심함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순수함에는 감탄하게 된다. 잊을 수가 없다. 책을 읽
어가는 과정에 떠오른 생생한 풍경. 반딧불보다 작지만 찬연한 색으로
빛나는 모습들. 그 상상만으로도 나는 그들이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
었다.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번듯하게 자란 건 결국 요정이라는 희
망과 이 녀석이 곁에 있어주었기 때문이다.
요정에 대해서는, 지금은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부정하면 그렇다고 해두는 편이 좋겠구나. 후후. 대신
이런 얘기는 어떠니? 그쪽 계통에서 꽤 유명한 얘기인데… 요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페어리fairy는 존재한단다. 이미 영국에서 사실로
서 증명되었지. 한글로 하자면 요정이나 페어리나 같은 얘기니 결국 요
정에 대한 증명일까?"
금시초문이다.
구미가 당기는 얘기에 연상과 망상을 벗어난다. 하지만 그렇게 선선
히 넘어갈 수는 없다. 불청객인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얼굴을 굳히고
말한다.
"엿듣기는 좋지 않은 취미에요, 선생님."
"어머. 일부러 엿들었던 게 아니라고 변명하면 넘어가줄거니?"
반칙이다. 어른의 미소를 짓고 어른의 대답을 날리며 다가오면 저항
하기 어렵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 한숨을 내쉰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맞춰주는 편이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는데 더 빠를
것 같다.
사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요정에 대해 증명된 사실이 있다고요?"
"그래. 윌라이트 스포어 씨의 유명한 저서인데, 혹시 모르니? 「윌라
이트 씨의 페어리에 대한 짤막한 레포트」라는 책인데. 1980년대에 발
간된 책이란다. 나름대로 꽤 유명한 책인데… 국내에는 정식 발간되지
는 않았지. 영국에서 일부에게 팔린 정도로는 국내 판매량을 보장할 수
없으니까."
"예, 예…."
길어질 듯한 내용이지만 말을 얼버무리기 애매해서 적당히 대꾸한다.
"무슨 내용인데요?"
"응? 아아. 다양한 얘기가 적혀있지. 영국에서 목격된 요정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서 해당하는 지역을 직접 방문해서 꽤 오래 체류하면
서 확인해본 경험도 적혀있고. 제목은 짤막한 레포트인데… 이게 막상
직접 읽어보면 분량이 어마어마하거든? 그런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흥
미롭기 그지없단다."
괜스레 꺼림칙한 느낌이다. 불청객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털어낼
수가 없다.
미스 라이넬―풀 네임은 라이넬.F.하이네라고 한다―은 유명한 선생
님이다. 혼혈교사는 드물다. 누구나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영어 교과목
이 아니라 과학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드물고 특이한 것은
주목받기 쉬운 대상이다. 더불어 나이가 젊다는 사실은 매력적인 감미
료로 작용한다. 유명하지 않을 리 없다. 혼혈임을 증명하는 듯한 육감
적인 몸매에 반한 놈들이 팬클럽에 준하는 집단을 여럿 만들었다는 소
문도 있다. 그런 인물이, 구석에서 떠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 같은
놈에게 접근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접근은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된다.
나는 방해받고 싶지 않다.
"세환 군, 요정에 관심이 많지?"
나는 긍정하고 부정한다.
나는 어디까지나 요정의 부재를 긍정하는 입장이다.
"네. 관심이 많긴 합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
기 위해서예요. 전 어디까지나 요정을 부정하는 입장이니까요. 저도 나
름대로 꽤 많은 자료를 찾아봤다고 자부하는데 페어리의 존재가 증명
되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네요. 확실한 건가요?"
"물론이지. 이래봬도 교사인데 학생에게 거짓말을 하겠니?"
당신이라면 할 것 같은데요.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참는다. 왜 이 여성을 상대로는 이렇게 부정
적이고 불길한 느낌을 받는 것일까. 나만이 아니다. 팔에 매달려오는
무게감을 느낀다. 흘끔 돌아보자 아까의 토라진 표정이 아니다. 격렬한
거절과 막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이 녀석의 이런 표정은 본 적이
없다.
미스 라이넬은 우리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방해받는 게 싫으니?"
"…네?"
이 사람,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건가?
동요를 감출 수가 없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면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눈앞의 여성은 단지 선
생님일 뿐이다. 꽤 유명하다는 것과 몸매가 좋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성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뭔가 본연적인 두려움이 눈앞의 여성에게는 존재한다. 그런 느
낌이 든다.
"어휴. 선생님을 그런 눈으로 보는 건 곤란하잖니. 아무리 좋은 시간
을 방해했어도 노려보는 건 곤란해. 알겠니? 언제나 웃는 거야. 불편하
면 불편할수록 웃어버리는 거지. 그것만으로 꽤 많은 문제가 해결되거
든."
미스 라이넬은 약간 흘러내린 안경을 중지로 고쳐 쓴다.
"흥미가 있다면 내일 오후에 과학 실습실로 오렴. 내일 그 책을 가져
올 테니까. 영어라서 읽기에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요정에 흥미가 있
다면 한 번쯤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알겠니?"
"네, 네…."
압도된 나는 그렇게 꼴사나운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2.
"요정은 있어."
평소와 같은 말이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다. 점심도 거르고 옥상에
누워있어서인지 그 중얼거림에 뭐라고 대꾸할 기력도 없다. 결정적으
로, 뒤에 이어질 말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대
꾸도 하지 않으면 마저 얘기할 것이다. 익숙한 패턴이다.
"그런 책, 읽지 않아도 돼. 우리끼리 충분히 증명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이 증명해놓은 요정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어. 우리가 증명해야해.
그렇지? 요정은 분명히 있으니까."
"너, 뭔가 착각하고 있어. 내가 찾는 건 요정을 부정하는 증거야."
짧은 침묵.
"아무튼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존재나 부재, 어느 쪽에 대한 증명이
라도 마찬가지야. 남의 힘을 빌리는 건 싫어. 결론이 어떻게 나오더라
도, 그 과정에 참여하는 건 우리뿐이어야 해."
부분적으로 동감이다.
하룻밤을 꼬박 고민했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론을 내
릴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해코지를 당할 일
도 없고 오히려 흥미로운 자료를 읽을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심정적
으로는 일부 동감하게 된다. 가지 않는 편이 절대적으로 낫다는 느낌이
든다. 정확하게는 가면 후회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어떻게 할까.
페어리테일(Fairy Tale)은 대부분 창작이다. 허구라는 뜻이다. 어릴
때는 어린 마음으로 그 허구를 진실이라고 믿었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
다. 부재하는 것을 믿는 건 망상이고 몽상이다. 그런 일은 지극히 평범
한 내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하물며 요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도 아니고 긍정하는 증거를 알
아서 뭐하겠는가. 내 입장에 반하는 자료는 필요하지 않다. 불필요한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 그런 건 쓸모없다.
하지만…
"구미가 당겨?"
"…멋대로 정곡을 찌르지 마."
솔직히 머릿속으로 부정적인 이유를 수도 없이 만들어내지만 흥미가
생기는 건 사실이다. 부정이든 긍정이든 어떤 미지의 대상에 대해 입장
을 표명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흥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정말로 부정하고 싶다면, 남들처럼 무시하면 된다. 관심을 갖고 있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가 파생되기 때문이다.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이지."
솔직하게 인정한다. 곁에서 움찔거리며 불안해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가기 싫다는 느낌이 들긴 해. 하지만 역시 흔치 않은
기회잖아? 외국 서적은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어. 게다가 80년대에 발
간된 책이면 이미 절판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잖아. 아니, 절판된 게
거의 확실하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읽어보기 어려울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남이 이룬 저작을 이용하는 건…."
"너 좀 이상하다? 옛날부터 여기저기 책 찾아보고 많이 했잖아. 동화
도 많이 읽고 설화도 많이 읽고. 도서관에서 요정에 대한 책은 무작정
찾아 읽은 적도 있잖아. 그런데 왜 그 책에 대해서만 유독 싫어하는 거
야?"
"그 책이 싫은 건 아냐. 하지만…."
그 책이 싫은 건 아니라고? 그럼 뭐가 싫은 거지?
뒷말을 기대하며 기다리지만 더 이상은 아무 말도 없다. 대체 뭐가
싫은 거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소녀는 결국 설명하지 않는다. 한
참 만에 돌아온 반응은 대답을 대신하는 부푼 양쪽 볼뿐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청개구리다. 명확한 이유도 설명도 없이 반대의견과
마주하면 거부하고 싶어진다. 나도 마찬가지다. 흥미와 함께 꺼림칙한
기분이 동시에 들어서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흥미가 압도적이다.
물론 흥미에 반항과 거부가 약간 뒤섞여있음은 당연하다.
나른한 몸을 이끌고 옥상을 나선다. 굳이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아도
뒤따라올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은 필요치 않다.
구교사 1층에 위치한 과학 실습실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어제의 연장일까, 괜스레 오싹한 기분이 든다. 순간적으로 경
고라는 생각까지 해버린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신경과민이다.
점심시간은 아까 지났다. 따라서 지금은 수업시간이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당하게 땡땡이라. 오랜만이다.
"실례합니다."
대답이 없다. 하지만 자물쇠가 걸려있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문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을
덮은 커튼의 영향으로 약간 어두웠지만 깜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깐 어디 가셨나봐. 들어가서 살펴보자."
가볍게 말을 걸었을 뿐인데, 오른팔에 매달려오는 체중이 느껴진다.
"꼭, 가야겠어?"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야."
비슷한 패턴의 대화를 반복해도 짜증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관계
의 주요한 특징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요정'에 대한 바보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의견 대립에서만 그렇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해당되
지 않는다.
"들어가서 살펴보자."
약간의 짜증스러움 속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미스 라이넬의 개인 소유물은 아마도 안쪽 방에 있을 것이다. 실습
실은 과학 실험이나 실제 수업에서 많이 이용되기에 개인물품을 놓아
두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다.
예상대로였다. 안쪽에 위치한 실습준비실에 들어서자 타인의 사적
공간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실험에 필요한 시약들을 특이한
모양의 병들에 담아둔 것도 틀림없이 미스 라이넬의 개인 취향일 것이
다. 소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연구실의 분위기가 묘하게 사로잡는다.
"기분 나빠…."
또다시 반복되는 약한 소리.
"너답지 않게 자꾸 왜 그래?"
"하지만 정말로 기분 나쁜 걸!"
한숨이 절로 나온다. 더 이상 퉁명스럽게 대하면 돌아가 버릴 것 같
다. 매달린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적어도 이렇게 해주면
기분이 가라앉는다는 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적당히 달래가며 책상
위를 훑어보니 쉽게 눈에 띄는 책이 있다.
친절도 하시지.
노란 쪽지에 「세환 군과 약속한 책」이라고 적어서 표지에 올려놓
으면 영어에 서투른 나라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동글동글하면서도
길게 뻗는 필체가 두근거린다. 절반의 흥미로 온 것치고는 제법 괜찮은
성과를 거둘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1980년대에 발간된 책이라고 믿기 어려운 낡은 책이다. 책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충 넘겨보다가 안쪽에 끼워진 한글에 시선을 빼
앗겼다. 대충 훑어보니 그 페이지를 번역해둔 내용 같았다.
- 「요정들Fairies」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루드비히 틱의 「요정들Die Elfen」에
해당하는 동화가 북부 에딘버러 외곽 지방에서 전해오는 것은
꽤 유명한 사실이다. 그동안 이런 이야기들은, 어떤 정해진
형식의 동화(m?rchen)가 각 나라별로 약간의 변화를 거쳐
유사한 형태로 이곳저곳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당연시
되어왔다.
하지만 「요정들Die Elfen」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충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요정의 세계를 방문했던 꼬마 마리는 요정들과 약속한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겠노라'고. 하지만
어리석은 이 아이는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한 후에, 요정들을 위한
변호라는 명목 하에 그 약속을 깨고 남편에게 얘기하고 만다. 그로
인해 요정들은 그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떠나간 요정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거처를 잃고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가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동안 비슷한 형태의 동화가 각
나라별로 형성된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수많은 나라에 비슷한 전개 방식의 설화가 동시다발적으로 파생
되었다는 견해보다 합리적이지는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기에 나는 일단 가장 가까운 에딘버러를 방문했다….
번역된 내용은 이렇게 끝났다.
요정의 존재증명과는 무관하게, 이 책의 저자가 글을 재미있게 쓴다
는 사실은 확실하다. 어쩌면 번역을 재밌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
튼 나는 영어는 젬병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흥
미가 동한 나는 앞뒤를 넘겨가며 달리 번역해둔 건 없는지 훑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번역된 것은 그 한 페이지뿐이다.
"헤에. 이거 꽤 재밌네?"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건성으로 말을 걸어본다. 여느 때라면
당장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입에서 빠져나온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방을 울린다.
"같이 읽어보자. 이거 봐."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다.
토끼. 안경. 빨강.
"…어?"
눈앞이 깜깜하다.
3.
― 다시, ON
토끼가 다가온다.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앞발에 들고 있던 외눈안경
을 능숙한 동작으로 코에 걸치고 다가온다. 사람의 손…과는 확실히 다
른 그 앞발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입에 물린 천 뭉치를 빼낸다.
"대체 목적이 뭐야?"
목적이 뭐냐고?
나는 스스로 내뱉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스스로의 침착한 목소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욕을 내지른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하는 반응은 당연하다. 이런 상황
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반응에 납득할 것이다. 하지만 목적이 뭐냐고?
너무도 침착한 대응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 부자연스러움이 나를 짓누
른다.
토끼는 낄낄거리며 어깨―어깨라고 지칭할 수 있다면―를 으쓱거린
다.
"지금, 목적이 뭐냐고 하셨습니까?"
빨갛게 물든 눈을 껌뻑이며 토끼가 되묻는다. 압도당할 것만 같은
기분을 애써 부정하며 토끼의 질문을 긍정한다.
"그래. 무슨 짓이야!"
토끼는 다시 낄낄거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 시선의 끝에는 알이 커
다란 안경을 고쳐 쓰며 미소 짓는 그녀, 라이넬.F.하이네가 있다. 미스
라이넬이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다가온다.
"이미 충분히 설명을 듣지 않았던가?"
"설명?"
"그래. 이건 예술이야. 아트(Art)라고 말하는 편이 더 어감이 좋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구나. 무슨 뜻인지 알겠니?"
…알 턱이 있나.
미스 라이넬은 싱긋 웃으며 부연한다.
"예술의 정의가 뭘까? 미적인 작품을 형성하는 창조활동이라고 생각
하기 십상이지. 하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단다. 예술가는 허구를 추구하
지만 동시에 그 허구를 현실화하고 구체화하는 것에 그 평생을 걸고
있지. 알겠니? 중요한 건 허구에 대한 추구가 아니야. 현실화하고 구체
화한다는 거지. 현실을 부정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는 거란다. 즉 예술
은 현실을 통한 창조활동이라는 뜻이란다."
분명히 말한다.
지금은 미술 시간도 아니고 음악 시간도 아니다. 더욱이 중등교육
과정에 포함된 고등학교에는 예술고가 아닌 이상 예술 시간은 존재하
지 않는다. (사실 예술고에 예술 시간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 농익은 미소를 던지며 학생을 묶어놓고 예술에 대해 장
황하게 설명하는 선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체 이 상황은 뭐야?
고함을 치는 대신 냉정해지려고 애쓴다.
조금 전 지나치게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던 건 혼란이 팽창해서 벌
어진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지극히 평범한 내가 이
런 괴이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 침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증거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조차 멀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과격하게
울린다.
삐걱거리는 기괴한 춤을 추는 건 내 소꿉친구. 그녀의 복부에서 퍼
져나가는 붉은 색은 틀림없이 피다. 위험하다. 솔직히 심각하게 위험하
다. 그 앞에서 외눈안경을 들고 신사인척 거드름을 피우는 토끼는 존재
자체가 이상하다. 게다가 토끼는, 앨리스의 토끼를 닮은 주제에 하는
짓은 「토생원전」의 토끼를 모방한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하자. 토생
원전에 등장한 토끼는 간을 빼놓고 왔다는 거짓말로 살아남는 존재다.
사람의 간을 파먹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간을 파먹는 건 구미호에
가깝다. 아니, 여우 그 자체다. 하지만 눈앞에서 건들거리며 춤을 추는
건 틀림없이 토끼다. 생물 과목 성적이 '양'인 나라도 토끼와 여우가 생
김새부터 다르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냉정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씩씩거리며 입술을 깨문다. 미스 라이넬은 내 모습을 바라보며 무엇
이 그토록 만족스러운지 시종일관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대체 이 빌어
먹을 상황은 뭐란 말인가. 요정?
십년간 부정했던 가능성이 나를 향해 인사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아, 네. 십년 전에는 제가 죄송한 일을 했군요.' 라면서 냉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녹록한 인간이 아니다. 나의 십년은 그렇게 쉽게
부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망상이 눈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 어때?"
숨을 헐떡거리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며 되묻는다.
"망상이요?"
"그래. 케케묵은 망상, 환영, 환상. 환각이라고 하던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어머. 아직도 모르겠니? 예술에 대해,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현실이
라는 것을 그토록 알려줬으면 당연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겠니? 중요한 건 현실이란다. 현실."
냉정하게 생각할 수 없으니 어려운 말 대신 쉽게 해줘. 부탁이니 가
능하면 짧게. 미스 라이넬은 알이 커다란 안경을 벗으며 한 걸음 다가
선다. 부담스럽고 무섭다. 이 상황에서 어른 여성의 매력을 느끼는 것
이 비정상일까, 아니면 그 매력까지도 두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정상
일까. 아무튼 무섭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몰아낼 방법도, 다가오는 그
녀를 멈출 방법도 없다.
묶여있는 내게 딱 붙을 정도로 다가선 미스 라이넬이 손을 쭉 뻗어
춤추는 소녀를 가리킨다.
"저 망상 말이야."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라이넬은 그 짧은 틈을 파고들며 내게서 입을 열 기회를 앗아간다.
"박세환. 십팔 세."
내 이름. 내 나이.
"십삼 년 전. 집이 전소되는 사고를 겪고 부모님을 잃었지."
듣고 싶지 않아.
"그 이후 할머니 댁에 맡겨진 채 성장. 연로하신 할머니는 기본적인
의식주의 제공과 학비 일부를 제외하고는 손자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
지 않으셨지. 방치, 혹은 방임주의적인 교육방침이셨던 것일까?"
당신이 옳아.
그러니까 그만둬.
"덕분에 책을 읽거나 바깥에서 혼자 노는데 익숙해진 네 교우관계는
엉망이었지.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을 정도로. 할머니 댁 주변에 인접
한 다른 가구도 없었으니 동네친구나 소꿉친구도 한 명도 없었겠지. 아
쉬운 일이야."
소꿉친구가 없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아. 물론 지금은 없지. 당신들이 이상하게 만들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군. 미리 말해두는데, '저것
'은 사람이 아니야. 우리는 '저것'을 이상하게 만들고자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야. '너'를 정상으로 돌려놓고 싶은 거지. 현실을 보렴. 망상을
잊고 현실을 직시해."
정상이라고?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 시점에서 당신들이 이상한 거야.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교우관계 제로. 초등학교, 중학교, 심지어는 지금 재학 중인 고등학
교에서도 친구는 한 명도 없음. 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을 바라
보고 놀거나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함. 구석을 좋아함. 이 자
료가 뭔지 알겠니? 전부 너에 대한 거야."
친구가 없는 게 아니야.
그 녀석 이외에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을 뿐이지.
"잘 생각해봐."
눈앞에서 매력적인 여성이 괴기스러운 웃음을 흩날린다.
"요정을 그토록 좋아하던 네가 언제부터 요정을 부정했는지. 십삼 년
전, 처음으로 요정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지. 그리고 그 삼년 동안 너무
도 절실하게 요정을 믿었어. 기억나지 않아? 네 할머니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를 걱정했던 그때를 얘기하는 거야. 하지만 정확히 삼년
뒤부터, 너는 요정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해왔어. 그 이
유는 왜지?"
그 이유, 그 이유는…
"사람 마음이 쉽게 변한다고들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알잖
니? 특히나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흔한 일은 더더욱 아니지. 하지만 너는 그 특이한
케이스에 속해. 왜지? 그 이유는 뭐지?"
이유. 이유 같은 건 없어. 난 단지…
"네 곁에 줄곧 있어준 '저것'을,"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요정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니?"
폭발한다.
감정이, 기억이 넘쳐흐른다.
"아니야! 그런 게 아냐! 저 녀석은, 저 녀석은!"
"지금 이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미스 라이넬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웃는다.
그리고 눈앞에서,
소꿉친구라고 믿었던 것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린다.
4.
진정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침착해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토끼와 라이넬 선생님은 나를 방치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반 착란 상태였던 내게 강제로 그 이상 얘기를 시도했다면 오히려
반항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과 같다. 가장 최초로 이루어지는
방어기제는 부정이다. 그런 상태의 나에겐 그 어떤 합리적인 설명도 부
정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적당한 시간만큼 내게 여유를 주고 합리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설명
했기에 나는 둘의 얘기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럴 듯한 얘기였다.
최초로 제시한 것은 학적부다. 생활기록부 상의 그 어디에도 그 녀
석의 존재는 긍정되어있지 않았다. 고등학교의 것만이 아니다. 중학교
때도, 초등학교 때도 그 녀석의 존재는 어디에도 기록되어있지 않았다.
미스 라이넬이 제시한 증거는 그것만이 아니다.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도 있었다. 그 테이프 속의 할머니는
너무도 담담하게, 줄곧 혼자서만 노는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내용을 늘
어놓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미쳐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미스 라이넬은 고개를 젓는다.
"너무 힘들었을 뿐이야. 그 괴로움을 공유해주고 분담해줄 인물이 없
어서, 그게 너무 힘들었던 거야. 그 상황 속에서도 지금 이상으로 심각
한 상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자랑스럽단다."
따스한 목소리가 해묵은 아픔마저 감싸 안는 듯한 느낌이다.
선생님의 주위를 괴상한 토끼가 낄낄거리며 춤을 춘다.
"네 앞의 환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네가 택한 방법은, 네가 그토록 강
하게 믿고 있던 요정을 부정해버리는 것이었단다. 요정을 부정하고 환
상을 부정하고, 형이상학적 이상 현상을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눈앞에
존재하는 환각을 긍정하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
지. 강한 부정은 동시에 강한 긍정이기도 하니까. 그토록 강하게 요정
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너는 무의식적으로나마 요정을 믿고 있었던 거
야. 진짜 요정이 나타나 너를 구해줄 것이라고."
"귀하는 너무 힘들었던 것입니다. 아까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
까? 예술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현실을 부
정한 망상과 허구는 예술의 대극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술은 결국 삶입니다. 예술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바람직한 삶을 완성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술을 위해서, 그리고 삶을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망상은 반드시 소거해야 합니다."
토끼와 라이넬 선생님이 미소 짓는다.
둘의 미소에 고개를 끄덕여 되돌려준다. 선생님은 한층 짙은 미소와
함께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어 토끼를 쓰다듬는다. 허구에 속한 외
눈안경의 토끼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공중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목적했던 바를 달성했으니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거칠게 대했음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그 망상이 너
무도 오래되었기에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것은
귀하의 감정에 반 이상 동조해서 구현된 것이었기에 망상의 존재를 명
확화하기 위해서 폭언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앞으로
는, 다시는 저런 망상에게 사로잡히지 않으시길 빕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토끼의 존재는 허공으로 흩어진다.
한순간에 이해했다.
저것이 요정이다.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요정이다. 십년을 함께 한 존
재를 단숨에 부정해버리며, 나는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그 모습이 아름
답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 저 토끼를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부끄럽다.
"선생님. 그럼 요정은 존재하는 건가요?"
라이넬 선생님이 가볍게 쿡쿡 웃으며 대답한다.
"글쎄. 결국 요정의 존재는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의해 결정되겠지?"
신뢰와 믿음, 그리고 긍정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다는 얘기일까. 어딘
지 철학적인 대답과 해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미스 라이넬과 걷는 복도는 묘한 기분이다. 언제나 곁에 있던 그 녀
석을 대신하는 매력적인 선생님. 색다른 기분이 느껴져서일까. 평소의
복도가 아름다운 색채로 느껴진다. 그 찬란함 속에서 나는 확신한다.
요정은 있어.
십년 만에 새삼 긍정하게 된 명제를 떠올리자 즐거운 기분이 된다.
그래, 요정은 있어. 지난 세월동안 곁에 있었던 것은 환상이고 망상이
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아스라이 사라져간 그 외눈의 토끼
를 보았다. 이제는 믿을 수 있다.
그래. 요정은 있다.
그때 누군가가 저 멀리서 나를 부른다.
"박세환!"
기분 좋은 생각을 방해하며 끼어든 이를 바라본다. 이름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클래스메이트의 이름은 그다지 기억하지 못한다. 친구를
사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름 유명했던 모
양이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으니.
곁에 선 라이넬 선생님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싱긋 미소 짓
고 되묻는다.
"무슨 일이야?"
"저기,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
"잠깐이라면 상관없어. 무슨 일이야?"
"이, 이거…. 종례 시간에 자리에 없어서 내가 맡아뒀어."
상대는 머뭇거리며 종이를 내민다. 전달사항이 적힌 프린트인 모양
이다. 적당히 책상에 놓아두었으면 알아서 챙겼을 텐데. 불필요한 친절
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 어떤 것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행복한 상태다. 행복감의 극치랄까.
프린트를 받아들고 대충 훑어본다. 시시껄렁한 내용뿐이다. 지금 막
소설 속에 등장할만한 대모험을 하고 온 내게 시시하지 않은 일이 어
디 있겠는가.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지.
"고마워. 덕분에 교실까지 가는 수고를 덜었네."
사회적 미소는 최고의 무기다. 미스 라이넬이 내게 알려준 것이다.
상대가 긴장을 푸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약간의 머뭇거림은 남아있
다. 볼일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왜 남아있는 것일까. 머릿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나를 향해 상대방은 큰 결심을 한 것처럼 질문한다.
"저기, 내가 그동안 약간 편견을 가졌던 것 같아서 미안해. 이렇게
말을 해본 김에 묻고 싶은 게 있어. 같은 반이 된 이후로 계속 궁금했
었는데… 이런 걸 물어보면 좀 실례일까?"
긴장이 전해져서 나까지 긴장해버릴 정도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끄
덕인다.
"왜 항상 허공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거야?"
왜 긴장했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묻기 곤란했을 것이다.
나도 설명하기 곤란하다. 그동안 줄곧 요정―환상―망상―을 향해
혼자서 지껄였다는 얘기를 함부로 떠벌릴 수는 없다. 그런 부끄러운 얘
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은 라이넬 선생님뿐이다. 둘러
댈 거리를 생각하다가 적당히 말해본다.
"앞으로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동안 이상하게 보여서 미안해. 사
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이젠 괜찮아. 다 해결되었으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어. 먼저 말을 걸어줘서 고마워.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 물론
네가 꺼려진다면 좀 더 두고 봐도 상관없어."
"그, 그래?"
안도의 표정을 읽고 속으로 웃는다. 생각해보면 겁을 먹는 것이 당
연하다. 혼잣말을 지껄이며 낄낄거렸을 자신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
다. 이제 그런 이상한 상황과는 작별이다. 전부 미스 라이넬 덕분이다.
나는 확신을 담은 채 대답한다.
"응. 물론이지. 그렇죠, 라이넬 선생님?"
눈앞의 표정이 굳어진다. 아까보다 심한 긴장이 느껴진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라이넬 선생님이 대체 누군데?"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야? 여기 계시잖아."
옆에 선 라이넬 선생님을 가리키며 설명하자 다가오던 클래스메이트
가 괴상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친다. 괴상한 표정에 명백하게 떠오른 그
감정은 공포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왜?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다가 곁에 선 라이넬 선생님을 바라
본다. 그녀는 피식 하고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나를 향
해 내민다.
깜빡이는 액정이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
「괴상한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WeirdLand).」
― OFF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어얼~스릴러군요~무서워라~>ㅂ<
(워낙 간이 작아서...;; )
잼나게 잘 읽었어요 ^^
헑 소리님! >ㅂ< 부끄럽게 그런 말씀을 //ㅂ//